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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국대 문예창작과 교수·시인 |
겨울에는 대파 뿌리를 버리지 않는다. 방안의 화분에 묻어 둔다. 흙이 마르지 않게 물을 잘 주면 며칠 안에 싹이 올라온다. 한 보름이면 두어 뼘 크기로 자란다. 굵고 튼실하지는 않지만 잘라서 얼마든지 요리에 쓸 수 있다. 대파 뿌리 십여 개만 묻어 놓아도 마트에 갈 필요가 없다. 근검절약하자는 말이 아니다. 화분 속에서 고개를 내밀고 올라오는 대파 싹을 바라보는 일만 해도 무조건 남는 장사다. 창밖에 쌓인 눈이 며칠째 녹지 않아도 창가에서 대파 싹은 독야청청이다. 모서리 터진 텃밭의 비닐하우스를 고쳐 내년 겨울에는 아예 대파 농사에 나서볼까. 허황된 꿈도 야무지게 꾸어본다.
작년 초가을에 수국 삽목을 시도했다. 가지를 잘라 작은 삽목 분을 백여 개 만들었다. 그늘에 두고 자주 물을 주었더니 배양토에서 이내 새순이 올라왔다. 제주도 조천 '시인의 집'에서 얻은 놈들도 씩씩하게 잎을 피워 올렸다. 나는 성급하게 마당을 수국으로 채울 날을 상상했다. 수국 묘목을 관리하는 방법을 검색하고 나서는 모래에 옮겨 심었다. 그러고 나서 묘목의 절반이 시들시들해졌다. 나는 조바심이 났다. 연말이 가까워질 때쯤 잎을 달고 있는 놈들을 모두 서재로 옮겼다. 마른 가지에서도 참새 부리만 한 싹이 돋고, 갓난아기 손바닥만큼 세력을 키운 놈들도 있다. 수국은 흙이 알칼리성일 때는 붉은 꽃을, 산성일 때는 푸른 꽃을 피운다고 한다. 나는 작은 연두색 잎사귀를 보며 호사도 이런 호사가 없다고 생각한다.
늦가을에 전남 장흥에 강연을 간 적 있었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축하하는 현수막이 읍내를 꽃처럼 덮고 있었다. 장흥에 사는 이대흠 시인을 만나 어린 멀구슬나무를 좀 캐달라고 부탁했다. 이 나무는 우리나라 남부지방과 제주도에서 흔히 만날 수 있다. 제주에서는 5월에 꽃이 피는데 그 알싸한 향은 고혹적이다. 멀구슬나무는 수형이 멋지지도 않고 가지를 제멋대로 뻗으며 오동나무처럼 빨리 자란다. 목수와 조경 전문가들은 별로 탐을 내지 않는다. 이 남쪽의 나무가 북쪽에서 뿌리를 내릴 수 있는가가 문제였다. 태안 천리포수목원에도 자란대. 거기하고 예천 우리집의 위도가 거의 비슷하니까 데리고 가서 잘 키워볼게. 얘 꽃 피우면 꽃 보러 와.
그렇게 해서 허리께만큼 자란 멀구슬나무 대여섯 뿌리는 자그마치 천리를 북상해서 우리집에 왔다. 볕 잘 드는 곳에 나누어 심고 짚으로 감싸주었다. 그 중 한 놈은 화분에 심어 방안에 들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잎이 돋기 시작해서 방안에서 지금은 제법 원래 모양의 잎사귀를 펼치고 자란다. 이십여 센티의 초록은 힘이 세다. 나의 과한 욕심을 용서받으려면 어떻게든 봄에 노지에 뿌리를 내리는 데 성공해야 한다. 멀구슬나무의 북방한계선을 바꾸는 것, 이게 이 겨울 나의 야망이다. 누군가 그건 어처구니없는 일이라고 핀잔을 준다고 해도 나는 멀구슬나무하고 겨울을 보낸다. 다정하게, 조금은 따스하게.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아닌 밤중의 홍두깨라더니 작년 12월3일 이후가 그러하다. 밀가루 반죽을 펴는 홍두깨가 지금까지 세상을 마구잡이로 두드려 패는 일이 벌어졌다면 이번 겨울은 숨조차 쉴 수 없었을 것이다. 세상에는 다행히 법이라는 통제 장치가 있어서 무소불위의 폭력은 면했다. 겨울은 길고 지루하지만 마당의 매화나무는 꽃망울을 달기 시작했다. 봄도 머지않으리.단국대 문예창작과 교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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