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인연이 깊어지는 순간
추억을 나누며 웃음 번지고
조건 없이도 이어지는 마음
지위나 부가 장벽 되지않아
함께한 시간들 소중히 새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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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찬희 (법무법인 율촌 고문 전 대한변호사협회장) |
더는 친구를 만들지 않기로 했다. 100세 시대에 환갑을 맞았으니 얼추 인생의 3분의 2는 살았다. 지금까지 만난 인연들을 한 번씩만 만나도 다 못 보고 떠날지 모른다. 부나 권력과 마찬가지로 인연도 차면 넘치고, 비워진다는 진리를 나이 먹으며 저절로 깨닫게 된다.
얼마 전 대구초등학교 시절 같이 보이스카우트를 했던 53년 전에 인연을 맺은 친구를 만났다. 상하이에 살면서 아직도 스카우트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다. 작년 초 필자가 한국스카우트연맹 총재가 되면서 SNS로 연락이 닿았다가, 드디어 한국 방문 길에 만나게 된 것이다. 졸업 후 처음이니 강산이 다섯 번 가까이 변할 정도로 시간이 지났건만 첫눈에 알아보았다.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다가, 그때 만들어 먹었던 지짐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초등학생들이 부침개를 만들어 먹다니 놀라겠지만, 사실 기름 두른 프라이팬에 묽은 밀가루 반죽을 올린 후 설탕을 찍어 먹은 것이다. 평양 길거리 음식이라는 건더기 거의 없는 반죽만 부침개 수준이지만, 세상 가장 맛있었다. 친구는 박주산채라도 행복이란 양념을 뿌려 진수성찬을 만든다.
지난주, 서울로 전학 와서 만난 44년 된 고등학교 동기들하고 사이판을 다녀왔다. 100세 시대에 아무도 알아주지 않은 환갑을 자축하는 여행이었다. 골프도 치고 태어나서 처음 스노클링도 하면서 정말 바늘 하나 들어갈 틈 없을 정도로 알차게 놀았다.
이 친구들은 필자가 가장 늦깎이로 군입대할 때 서울역에서 진주 공군교육사령부까지 7시간이 넘는 먼 거리를 동행해주었다. 입영열차 안에서 쉬지 않고 놀았던 그 체력이 30년이 훌쩍 지나도 남아 있는지, 피곤해서 금방 잘 것 같았지만 이미 수백 번은 더 했을 추억들을 재생하면서 다시 깔깔대고 웃으며 늦은 밤까지 술잔을 기울였다.
이제 꽃피는 봄이 오면 사회에서 만난 친구와 남도로 맛집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 여수에서 사업을 하는데 의뢰인으로 만났다. 본래 변호사는 의뢰인과 친구가 되려 하지 않는다. 친해지면 수임료도 깎아줘야 하지만, 당사자와 동화되어 객관성을 잃을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궁합이 맞아서인지 20년 넘는 시간을 보내며 이젠 눈빛만 스쳐도 속마음을 안다.
집도 가까워 간혹 퇴근 시간에 연락이 닿으면 한잔 거나하게 마시고 주고받는 실없는 농담에도 항상 깔깔거리며 웃어준다. 친구가 가장 힘든 순간에 처했을 때 충남 당진에 있는 솔뫼성지와 합덕성당에 데리고 갔다. 두 곳 모두 필자가 살면서 힘든 순간마다 찾아가는 혼자만의 힐링 포인트인데 아낌없이 공유해 주었다.
프랑스의 법학자이자 미식가였던 장 앙텔므 브리야 사바랭은 자신의 저서 '미식예찬'에서 "당신이 무엇을 먹었는지 말해 달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겠다"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필자는 "당신의 친구를 말해 달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겠다"라고 말하고 싶다.
살면서 영남·서울·호남 친구도 골고루 만나면서 소멸하지 않는 지란지교(芝蘭之交)의 마일리지를 쌓았다. 친구 사이에는 지역이, 사회적 지위나 부가 아무런 장벽이 되지 못한다. 우리는 인생의 큰 목표도 없었다. 그저 순간순간 가족과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왔을 뿐이다. 다만, 우리 모두에게는 꿈이 있었다. 행복하게 살겠다는 꿈이다. 환갑이 된 지금, 그 꿈이 이루어졌음을 확신한다. 왜냐하면 친구는 행복이기 때문이다.
이찬희 (법무법인 율촌 고문 전 대한변호사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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