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에 맞선 이민자 여성
탄압을 피해 망명한 유대인
인종발언 배우에 대한 냉대
집권2기 첫 시상식 메시지도
사회·정치적 다양성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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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근 문화평론가 |
이번 시상식에서 사회를 맡은 코넌 오브라이언은 세계 10억 인구가 시청한다며 다양한 언어로 인사했다. 이런 대목에서부터 다양성의 가치가 표현됐다. 무려 13개 부문 후보로 지명되며 올 아카데미의 주인공이 될 것으로 기대를 모았던 '에밀리아 페레즈'는 여우조연상, 주제가상 등 단 두 부문의 수상에 그쳤다. 여주인공 카를라 소피아 가스콘이 2021년에 다양성의 가치에 위배되는 발언을 했다는 것이 뒤늦게 알려졌기 때문이다. 당시 그녀는 흑인과 한국인 윤여정의 아카데미 수상 등을 보며 "내가 아프리카-한국 축제나 흑인 인권 시위, 3·8 여성대회를 보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고 SNS에 썼다고 한다. 이것이 알려지자 그녀가 출연한 작품 자체가 냉대 받았고, 시상식 현장에선 사회자가 객석에 앉은 그녀를 대놓고 조롱하기까지 했다. 할리우드가 다양성의 가치를 얼마나 중시하는지를 알 수 있다.
그렇게 '에밀리아 페레즈'가 냉대받는 와중에도 여우조연상만은 받았는데, 수상자인 조이 살다나는 "나는 도미니카 이민자 가정 출신이다. 스페인어로 연기해 상을 받은 내 모습을 할머니가 자랑스러워하실 것"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이민자와 외국어를 내세운 것이다.
저예산 독립영화 '아노라'가 작품상·감독상·여우주연상·각본상·편집상 등을 휩쓸며 대이변을 일으켰다. 이 작품은 우즈베키스탄 이민자 가정의 2세 스트리퍼 여성이 러시아 재벌 2세와 결혼하려 하자 러시아 재벌이 방해한다는 내용이다. 여기선 이민자 가정의 성 관련 업종 종사자 여성을 조명했다. 사회적 약자를 조명한 것이다. 이 작품의 감독이 원래 불법체류자, 홈리스 등 소수자의 삶을 그려왔다. 그런 이력도 수상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사회자는 이 영화를 소개하며 "미국인들이 강한 러시아인에게 맞서는 장면을 보게 돼 신난 것 같네요"라고 말했다. 최근 트럼프 미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핍박하며 러시아 편을 드는 것 같은 모습을 보인 것에 대한 반발이다. 편집상 시상자가 무대에서 "슬라바 우크라이나"(우크라이나에 영광을)이라고 외치기도 했다.
남우주연상도 이민자 역할에 돌아갔다. 홀로코스트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헝가리 출신 유대인의 이야기를 그린 '브루탈리스트'의 에이드리언 브로디다. 그는 홀로코스트 비극에 휘말린 유대인 역할로 2003년에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았었다. 할리우드 주류가 유대인들이라서 홀로코스트 이슈에 호의적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런 아카데미에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정책을 비판한 '노 아더 랜드'가 장편 다큐멘터리상을 수상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트럼프의 친 이스라엘 정책과 배치되는 시상이다.
한편 '007' 시리즈 50주년 기념 공연에 케이팝 가수 리사가 오른 것도 다양성의 가치를 보여준 장면이었다. 트럼프 집권 1기 때도 할리우드와 트럼프 정권은 불편한 관계였다. 집권 2기가 시작된 직후 거행된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을 보니 앞으로도 관계 개선은 어려워 보인다.
하재근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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