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마다 배상 신청 줄줄이
"내가 적게 받고 합의해줄게"
피해자끼리 경쟁하는 현실
'좋은 기회'는 문자나 유튜브
오픈채팅방으로 오지 않아
![]() |
정혜진 변호사 |
"주식 리딩방 사기를 당해서… 사기꾼이 잡혔다고 연락이 왔는데… 돈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지자체가 운영하는 무료법률상담실을 찾아온 중년의 남자는 말 중간에 계속 한숨을 쉬었다. 보이스피싱 사기, 전세 사기에 이어 요즘 가장 피해가 많은 수법이 주식 리딩방 사기다. 유능한 전문가가 이끄는(리드) 모임에 들어와 따라 하기만 하면 당신도 큰 수익률을 올릴 수 있다는 문자나 오픈채팅방 초청에 긴가
"선생님, 상심이 크시겠어요. 제가 몇 가지 알려드리긴 할 텐데 돈을 실질적으로 받는 건 어려울 수 있어요."
민원인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도 알아볼 만큼 알아봤을 것이다. 이론적으로는, 손해 본 금액에 이자를 더한 배상을 사기꾼한테서 받을 권리가 있다. 하지만 권리가 있다고 돈을 쉽게 받을 수 있던가. 일단, 잡힌 사기꾼은 보나마나 말단 자금세탁책일 것이다. 여러 은행을 다니며 범죄수익금을 현금이나 수표로 인출한 뒤 이를 다른 조직원에게 전달하는 일을 하는 이들은 비교적 쉽게 잡히지만, 대부분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고수익 알바'에 혹해 일하는 이들이라 돈이 있을 리 없다. '총책'이나 중간급 간부들은 해외에서 점조직으로 범죄 단체를 관리하기에 잡기 어렵다. 그러니 사기꾼이 잡혔다고 해봐야 돈 없는 하수인이니 피해 변제를 받을 길은 막막하다. 그나마 가족 간 유대관계가 있는 초범이라면 가족이 빚을 내서라도 감형을 위한 합의 노력을 하는 경우가 있으니 거기에 기대는 게 가장 현실적이다.
사기꾼 재판의 사건번호를 아시느냐 물으니 봉투 안에서 서류를 꺼내 내민다. 범죄피해자에게 대한 통지서에 적힌 사건번호를 검색해 보니 아니나 다를까 이미 배상명령신청이 줄줄이 달려 있다. 피해자들이 한둘이 아닌 것이다. 일단 배상명령신청부터 하라고 권하면서, 피고인의 변호인에게 전화를 해 적절한 금액을 받으면 합의를 해줄 의사가 있다는 말을 남겨두라고 했다. "조금이라도 준다고 하면 합의서도 써 주시고 무조건 받으세요. 합의서 써준다고 판사님이 무조건 감형해주지 않으니 걱정 마시고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다시 긴 한숨을 쉬며 고맙다고 인사하며 나가는 민원인의 뒷모습에서 피해자들이 처한 냉혹한 현실이 보인다. 가장 '싸게', 그러니까 피해금에 비해 가장 적게 받으면서 합의하겠다고 하는 피해자가 돈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그나마 있다. 속아서 돈을 잃는 것도 비극이지만, 돈을 받기 위해 피해자들끼리 '내가 더 적게 받고 합의해주겠다'고 경쟁해야 하는 현실은 그야말로 '웃픈' 비극이다.
그런데 이런 비극을 막는 길은 의외로 간단한다. '이렇게 좋은 기회를 왜 내게 권하지?' 한 번만 생각해보면 된다. 좀 해보고 아니면 나오지 뭐, 하면 이미 늦다. '좋은 기회'는 결코 문자나 오픈채팅방이나 유튜브 광고로 오지 않는다.정혜진 변호사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