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영은 태생적 조건이 아닌
제도를 만드는 정치가 결정
탄핵 판결 후 예상되는 갈등
귀중한 공동체를 깨버리는
반동적 힘 될까 우려스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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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 업 객원논설위원 |
계엄사태가 시작되기 딱 한 달 전인 작년 11월4일 세계은행(WB)은 가나, 남아공, 우즈베키스탄 등 19개 개발도상국의 정부 관계자를 제주로 불러 모았다. 한국의 발전상을 공유하는 자리다. 세계은행은 작년 8월 '2024년 세계개발보고서 : 중진국 함정'을 공개하고, 투자와 기술 도입, 기술혁신 등 이른바 3i전략을 돌파구로 '중진국 함정'을 빠져나온 한국을 "성장 슈퍼스타"라는 극찬과 함께 중진국 정책 관계자들의 필수 참고사례('required reading')로 평가했다. 한국은 연구개발(R&D)과 교육에 대한 적극적인 투자를 통해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킨 결과, 1961년 1인당 GDP 94달러에서 2020년 3만1천638달러까지 급성장을 이루었다. 이에 더해 1997년 외환위기를 계기로 금융 및 재벌개혁을 추진하여 시장 담합과 경제력 편중을 완화하고 벤처기업을 활성화하는 등 해외개도국들이 따를 만한 족적을 남겼다. 식민지 역사를 가진 국가 중 고소득국으로 뛰어오른 세계에서 유일한 사례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한계라는 'peak korea'의 어두운 그림자가 지금 우리 사회를 짙게 드리우고 있다. 우리 머리 위의 천장을 깨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제까지 겪은 것보다 훨씬 감당하기 힘든 변화의 고통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의 저자 이언 모리스는 성장을 이룬 한 국가가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발전의 역설'이라는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고 분석한다. 사회는 발전할수록 오히려 발전을 저해하는 반동을 직면하는데, 이것이 발전의 역설이다. 이 반동적인 힘은 혁신적인 변화가 아니면 뚫을 수 없는 '단단한 천장'을 형성한다. 한 국가가 이 천장을 부수고 위로 올라가지 못하면 정체되거나 붕괴되고 만다는 것이 역사적 통찰이다. 1세기 로마 제국이 이 천장에서 튕겨 나와 붕괴의 길을 걸은 이후 서구사회의 재도약은 17세기 산업혁명까지 무려 1천500년 이상 걸렸다. 윤희숙 전 KDI 교수의 지적을 빌리면, 성장률이 둔화된 2010년대 이후 우리 경제의 정체 이면에는 입법·사법·행정의 시대적 부정합성, 경제구조의 쇠락, 저출산과 지방소멸, 정치리더십에 대한 불신, 이 네 가지가 도사리고 있다. 이언 모리스 관점에서 지금 우리나라가 단단한 천장에 다가가고 있다는 불길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윤 전 교수가 지적한 곪은 환부를 뜯어보면, 한마디로 정치의 실패나 다름없다. 저출산과 지방소멸은 안정적인 일자리 확보문제와 역동적인 국가비전의 사회적 공유와 직결되어 있고, 경제구조의 쇠락은 유연성이 없는 노동 규제를 빼고는 설명이 안 되는 것들이다. 국가체제의 개혁과 정치리더십 문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국회는 민생을 부르짖지만 당근 주듯 하는 얼마간의 생계비 지원보다 먹거리와 일자리 확충에 진짜 중요한 반도체 특별법이나 국가기간전력망 확충법 처리는 이념대결로 아예 뒷전으로 밀려난 상태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대런 아제모을루 교수는 전승된 신념과 학설에 대해 무비판적이고 몰역사적인 교조주의(dogmatism)의 폭주를 막는 법치기반의 포용적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이 동행하는 아주 좁은 회랑을 통해서만 국가 발전이 가능하다고 통찰한다. 결국 국가의 번영은 태생적 조건이 아니라 이러한 제도를 만드는 정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고,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는 분명해진다. 하지만 헌법재판소에서 탄핵 판결 이후 예상되는 갈등과 혼란은 우리를 단단한 천장에서 튕겨 나오게 하고, 온갖 고난을 뚫고 여기까지 달려온 우리의 귀중한 공동체를 깨버리는 발전의 역설이 될까 매우 우려스러운 것도 어쩔 수 없다.
권 업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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