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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어느 레지스탕스 위조범의 생애…1만명을 살려낸 염색공 아돌포 카민스키 실화

2025-03-21

2차대전 당시 10대 소년 레지스탕스

여권 등 일주일 500건 감쪽같이 위조

나치와 싸운 아버지 삶을 딸이 담아

[신간] 어느 레지스탕스 위조범의 생애…1만명을 살려낸 염색공 아돌포 카민스키 실화
프랑스에 있는 제2차 세계대전 레지스탕스 기념비. <게티이미지뱅크>
[신간] 어느 레지스탕스 위조범의 생애…1만명을 살려낸 염색공 아돌포 카민스키 실화
사라 카민스키 지음/이세진 옮김 /빵과 장미/272쪽/2만2천원
2023년 1월10일 '르몽드' '리베라시옹' '뉴욕 타임스'를 비롯한 유력 신문들은 아돌포 카민스키가 프랑스 파리의 자택에서 97세를 일기로 영면했다고 보도했다. 카민스키는 2차대전 당시 쥘리앵 켈레르라는 가명으로 레지스탕스에 가담해 여권과 신분증, 문서를 위조해 1만명이 넘는 사람들을 살려냈다.

카민스키 가족은 타의로 여러 차례 삶의 터전을 옮겼다. 러시아에서 프랑스에서, 프랑스에서 아르헨티나로, 아르헨티나에서 다시 프랑스로. 카민스키의 최종 학력은 초등학교 졸업. 가난한 가족의 생계를 돕기 위해 열세 살 때부터 공장에서 일했다. 카민스키는 염색업자의 견습생이 되어 화학의 근본 원리를 깊이 탐구했다. 이렇게 먹고살기 위해 익힌 기술로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하고 자신의 목숨 또한 살렸으니 얼마나 야릇한 인생의 아이러니일까.

1943년 카민스키 가족은 파리 외곽의 드랑시 수용소로 끌려갔다. 이 드랑시에서 수만 명의 유대인이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수용소로 끌려가 목숨을 잃었다. 이들 가족이 살아난 것은 순전한 행운이었다. 아돌포의 형 폴이 필사적으로 아르헨티나 영사의 청원에 매달리지 않았다면(가족의 국적이 아르헨티나였다) 그들 역시 가스실에서 죽었을 것이다. 다시 세상으로 나왔지만 가족의 처지는 여전히 위태로웠다. 신분증에 커다랗게 '유대인'이라고 찍혀 있었기 때문이다. 카민스키의 아버지는 살기 위해 위조 신분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친구를 통해 레지스탕스에 접촉하기로 했다.

레지스탕스는 그의 염색 기술에 관심을 보였다. 카민스키는 놀라운 수완과 창의력을 발휘해 여권과 신분증, 결혼증명서, 세례증명서, 배급허가증 등 나치의 추적을 피하는 데 필요한 모든 서류를 감쪽같이 만들어냈다. 파리 위조범의 놀라운 능력에 대한 소식이 레지스탕스 네트워크에 퍼졌고 카민스키의 작업실은 일주일에 최대 500건의 주문을 받았다.

카민스키의 위조 작업은 나치가 패망하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남았지만 '조국'을 잃어버렸기에 팔레스타인에 새 조국을 건설하기를 열망하던 유대인, 제국주의 프랑스에 맞서 싸우던 알제리인, 베트남의 전장에서 탈영한 미군 병사 등이 카민스키가 만든 위조 여권으로 목숨을 건졌다. 쫓기는 사람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사람들을 위해 헌신했지만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어쩌다 위조범이 되었느냐고 묻자 카민스키는 "그냥, 어쩌다 보니…" 라고 답했다고 한다.

테드(Ted) 강연에서 지은이 사라 카민스키는 어떻게 이 책을 쓰게 되었는지 말한다. 아돌포는 사진가이자 교사였고, 자식들에게는 항상 법을 잘 지켜야 한다고 엄히 가르친 아버지였다. 이 책을 쓴 딸 사라는 알제리에서 태어났다. 주변 사람들은 존경을 가득 담아 아버지를 무자이드(전사)라고 불렀고 아버지가 제2차 세계대전과 알제리 전쟁에 참여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사라는 한 아이의 어머니가 되었고, 이제 나이가 한참 든 아버지에게 진실을 알아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이대로 침묵하며 비밀을 간직한 채로 세상을 떠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불러내야 할 기억도, 찾아야 할 사람도, 방문해야 할 장소도 많았다. 책을 쓰자는 제안에 아버지는 바로 동의했지만 걱정이 있었다. "사라, 공소시효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니?" 공소시효, 아버지가 무엇보다 먼저 알고 싶어한 것이었다. 죽음에 직면한 사람들을 도울 때마다 아버지는 법을 어겨야 했고 대의에 헌신하느라 감옥에 갈 위험, 심지어 사형을 당할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아버지가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는 데 그토록 오랜 세월이 걸린 이유였다.

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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