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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욱의 민초통신] 광인들의 배, 혹은 '바보 배'

2025-05-13

'도둑입당'과 후보교체 시도

규범·질서를 깬 야밤의 광풍

당내 권력 둘러싼 탐욕 추태

폐부 찌르는 바보 배의 충고

지금 국힘엔 들리지 않는 듯

[민병욱의 민초통신] 광인들의 배, 혹은 바보 배
한국언론진흥재단 전 이사장
'광인(狂人)들의 배', 미친 사람들로 가득한 배의 이야기를 현대 대중의 상상 속으로 끌어온 이는 철학자 미셸 푸코다. 중세 유럽의 강과 수로에 광인들을 실은 배가 실제 떠다녔다는 주장으로 사유를 시작하는 저술, '광기의 역사'를 통해서다. 푸코는 1494년 독일에서 출간돼 선풍을 일으킨 풍자시집 '바보 배'(제바스티안 브란트 저)와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같은 제목의 그림(Das narrenschiff)은 르네상스 전반기 유럽에 큰 상상력과 상징성을 부여한 실재의 배들을 모델로 한 것이라고 보았다.

푸코에 따르면 중세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저능, 즉 바보도 광란 조광증(躁狂症) 우울증과 함께 감독 치유해야 할 네 가지 등급의 정신질환 중 하나였다('광기의 역사' 후주). 그래 바보를 포함한 광인 부랑자들은 사회로부터 분리 배척되었고 한 배에 태워져 유랑의 길로 내몰렸다는 것이다. 그들이 탄 배를 '광인들의 배'로 하든 '바보 배'로 부르든 별 상관이 없다는 설명일 터다. 그래선지 한국에서는 번역자에 따라 그 이름이 달라졌다.

#탐욕과 본능이 춤추는 배

그러면 이처럼 바보, 광인들이 모여 탄 배의 행로는 어디일까. 추방돼 떠도는 그들을 누가 어느 항구에서 받아줄 것인가. 또 일견 자유로워 보여도 기실 빠져나갈 방도가 없는, 배라는 갇힌 공간에서 불확실한 항해에 나선 바보 광인 집단은 어떤 행태들을 보였을까. 그간 함께 했던 도시의 이성과 규범 질서를 따랐을까, 아니면 욕망 쾌락 등 본능에 충실한 태를 나타냈을까. 보스의 그림은 그런 광인 바보들 모습을 매우 음울하고 불안하게 그려낸다.

바람을 맞을 돛조차 없는 방주 같은 공간에 술과 식탐, 성욕과 쾌락에 눈이 벌건 군상들이 옹기종기 앉았다. 먹고 마시고 소리치고 기어오르고 굴러떨어지는가 하면 토하는 모습도 보인다. 고기 한 덩이에 한 입을 대려는 남녀 성직자에 뭔가 고발하듯 외치는 사람, 검푸른 물에 빠져서도 배에서 흘러내리는 술과 음식을 받느라 정신없는 이들로 그림은 가득 찼다. 여기서 무슨 미래가 보인다면 그건 거짓이다. 광인들의 배, 바보 배에서 보이는 건 무질서와 추태, 끈적거리는 욕망과 고함이 한데 어우러져 세계의 어둠으로 차츰차츰 미끄러져 들어가는 종말일 뿐이다.

# 또 야밤에 벌인 쿠데타

마치 15세기 광인들의 배가 21세기 한국의 정치판에 비집고 들어온 듯한 풍경이 지난주 벌어졌다. 국민의힘 엘리트들의 당내 권력을 둘러싼 탐욕 추태가 화산처럼 솟구쳐 끝내는 당의 질서와 규범을 송두리째 짓밟았다. 적법하게 선출된 대선후보를 야밤에 멋대로 바꿨다가 또 물리는 막장극이 펼쳐졌다. '알량한' 당권 유지를 위한 음모의 일환으로 벌어진 것으로 추측되는 그 드라마에서 그들이 치고받고 싸우며 헐뜯고 욕하는 모습은 국민에게 실시간으로 생중계되었다. 어제와 오늘, 오전과 오후가 다른 거짓말 헛소리가 수십 가지 여과 없이 공개됐다.

한 달도 안 남은 대통령 선거에 임하는 어제의 국민의힘 모습은 지금 '바보 배'에 탄 미치광이 짓거리로 변모했다. 50억을 들여 세 차례 경선을 거치며 합법적 대선주자로 선출한 김문수 후보의 직을 당 지도부는 딱 한 주 만인 10일 새벽 전격 박탈했다. 자기들이 점지해 밀약도 한 전 대통령 권한대행 한덕수 무소속 후보와의 단일화에 미온적이란 이유였다. 그리곤 곧바로 새 대선후보자 등록 공고를 냈다. 불과 1시간이 안 된 새벽 3시 무렵, 그 야음에 한씨는 32종의 서류를 다 갖추어 국회에 들어가 '도둑 입당'과 함께 후보 등록을 했다. 지도부 외엔 아무도 몰랐던 새벽 3~4시 등록 시간을 맞춘 건 그가 유일했다. '짜고 치는 고스톱'인 건 누가 봐도 분명했다. 대선의 원인이 된 윤석열씨의 야밤 계엄령 친위쿠데타에 이은 또 한차례 쿠데타, 대선 후보직 탈취 시도였다.

국민이 속아 넘어갈 줄 알았을까, 한씨의 말이 가관이다. 도둑 같은 새벽 입당과 후보 등록으로 정식후보직을 다 딴 듯 "단일화는 국민 명령"이라는 것이다. 또 "대선에서 이기기 위해서라면 김덕수(김문수+한덕수) 홍덕수(홍준표+) 안덕수(안철수+) 나덕수(나경원+), 그 어떤 덕수라도 되겠다"라며 사과보다 지지를 호소했다. 그러나 느닷없는 계엄 쿠데타가 국민과 국회에 의해 저지되었듯 한씨의 후보직 약탈 기도도 몇 시간만에 물거품이 됐다. 국민의힘 전 당원의 ARS 투표 결과 한덕수로의 대선 후보 교체 안건이 찬성 과반을 못 넘겨 부결된 것. 규범과 질서를 깬 광풍은 단숨에 스러졌고 머쓱해진 한씨는 제풀에 물러나 후보는 '도로 김문수'로 확정됐다.

# "윤 통과 두 놈, 천벌 받을 것"

김문수를 한덕수로 후보 교체하려는 시도가 한창일 때 홍준표 전 대구시장이 내놓은 코멘트가 압권이다. "3년 전 두 놈이 윤석열을 데리고 올 때 당에 망조가 들더니 또 엉뚱한 짓으로 당이 수렁에 빠져 보수 진영은 다시 궤멸되네"라고 한탄하며 "윤 통과 두 놈은 천벌을 받을 것"이란 저주를 덧붙였다. '두 놈'이 누구인지 실명을 밝히진 않았으나 권영세 비대위원장과 권성동 원내대표, 이른바 '쌍권'을 지칭한 것은 분명했다. 원조 윤석열계인 그들은 김문수가 단일화에 미적거리자 "알량한 후보 자리 지키려고 한심한 짓"을 한다거나 "큰 지도자가 되려면 자신을 버릴 줄도 알아야 한다"라고 코앞에서 윽박지르는 등 정당민주주의와 당헌은 물론 당인 도의에 어긋난 언행들을 서슴지 않았다.

윤 전 대통령 행보도 마찬가지다. 김문수 후보가 확정되자 또 판에 끼어들었다. 헌법재판소의 파면 결정을 부정하면서 이번 대선을 비상계엄 찬반, 즉 윤석열 찬반 대선으로 만들겠다는 뜻까지 드러냈다. SNS에 "자유 대한민국 체제를 지킬 것인가, 무너뜨릴 것인가 그 생사의 기로에 선 선거"라고 의미를 내세우며 "탄핵 정국에서 손잡고 하나 되어 끝내 무너지지 않았던 그 용기, 신념을 다시 꺼내달라"고도 했다. 서부지법 폭동을 일으키고, 헌재를 위력으로 압박했던 극우세력 시위를 두둔하며, 결집하라고 촉구한 셈이다. '광인들의 배' 혹은 '바보 배'에 승선해 나라야 어디로 가건 제 욕망만 채우고 보겠다는 심보가 아니고는 이럴 수 없는 노릇이다.

15세기 브란트의 시집 '바보 배'에는 지금 한국 현실에 꼭 맞는 명구들이 즐비하다. 어느 바보에 대한 시는 "천태만상 바보들이 권력만 믿고 까부네. 권력이란 마르고 닳도록 지속하는 줄 알지만, 봄볕에 눈 녹듯이 스르르 사라지고 만다네"라고 한탄한다. 누구나 아는 쉬운 말로 속삭이듯 말하지만 폐부를 찌르는 바보 배의 충고가 지금 국민의힘에는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민병욱 한국언론진흥재단 전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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