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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지대] 마음의 예복, 마지막 성장(盛裝)

2025-06-16 06:00
이향숙 산학연구원 기획실장

이향숙 산학연구원 기획실장

얼마 전, 지인의 모친상을 다녀왔다. 영정 사진 옆에는 조화 대신 낡은 수첩, 손때 묻은 안경, 그리고 스카프 한 장이 놓여 있었다. 검소하고 소박한 유품이었다. 흔한 빈소의 풍경은 아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가족들이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어머님의 흔적일 것이다. 그 풍경은 지금도 선연히 떠오른다. 어쩌면 가족들이 준비한 '마음의 예복'이 아니었을까 싶다.


25년 전, 혼수 상자에 담긴 수의(壽衣)가 생각났다. 친정어머니는 맏딸의 혼수로 최상급 삼베(麻布)를 구해 명인의 손길로 수의를 완성했다. 그 옷은 마지막을 준비하는 옷이 아니라 시아버님의 장수(長壽)를 기원하는 '마음의 예복'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지금까지도 그 수의는 장롱 깊숙이 고이 잠들어 있다. 여전히 꺼내지 않은 그 사실이, 새삼 감사하게 느껴진다.


전통적으로 한국 사회에서는 윤달을 '신도(神道)가 쉬는 달'이라 여겨, 이사나 혼례는 물론 수의 준비에도 길한 시기로 삼았다. 홍석모의 '동국세시기'에는 "윤달은 꺼릴 것이 없어 수의를 만들기에 좋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윤달에는 모든 의례가 허용되니, 기쁜 일도 슬픈 일도 미리 치러두면 탈이 없다는 뜻이다. 또 유중림의 '증보산림경제'에는 "부모가 마흔을 넘으면 사전에 수의를 준비하라"는 조언이 실려 있다. 이처럼 윤달을 둘러싼 기록들은 단순한 예식 지침을 넘어, '마지막 성장(盛裝)'을 준비해도 좋다는 윤달의 너그러움을 말해준다.


'수의(壽衣)'라는 말은 <조선왕조실록> 광해군 즉위년(1608)에 '죽은 이를 돕는 예물'이라는 부의(賻儀) 항목을 통해 처음 언급되며, 순조 대에 이르러 장례용 염습 의복으로 지칭했다. 출토 복식 유물로 보면, 조선 중기까지는 평상복이나 새 옷을 그대로 사용했지만, 후기에는 형태와 크기를 달리해 별도 제작한 전용 수의를 제작하는 관습이 자리 잡는다. 시대가 변하고 달라져도 수의는 언제나 삶과 죽음을 잇는 의례의 매개로 존재했음은 분명하다.


조선 초기 평민들은 저고리와 바지를 평상복으로 입었고, 이러한 일상복은 때로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하는 예복이 되기도 했다. 목화솜과 모시로 지은 소박한 옷은 따뜻함을 품은 채, 죽음을 대하는 이들의 태도가 검박(儉朴)했음을 드러낸다. 조선의 중인과 상인 계층 또한 사치보다는 절제를 중시하며, 실용적인 평상복으로 삶의 마무리를 준비하는 전통을 이어갔다. 마지막 순간까지 검소함을 지키고자 했던 옛사람들의 겸허함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오늘날 상례는 관혼상제 중 가장 엄격한 예식이다. 진짜 예복은 화려한 의전이 아니라, 고인의 삶을 기억하는 손길이다. 예컨대 평소 고인이 즐겨 입던 옷 한 벌, 사랑하는 손자 손녀의 편지, 마지막 문장까지 음미된 애도의 글귀들이다. 이런 상징물이 모여 '마음의 예복'을 이룬다. 그것을 준비한다는 것은 곧 남은 이들을 위한 치유의 과정이기도 하다. 사진 옆에 국화 한 송이를 살며시 내려놓듯, 손길 하나하나가 서로의 마음을 보듬는다. 그 위에서, 생의 아름다움은 더욱 가치를 지니게 된다.


수의는 삶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순간, 겸허하고 정갈한 몸가짐을 완성하는 옷이다. 옛사람들이 그 안에 담았던 것은 자신의 가장 소중한 기억과 일상의 따스한 온기였다. 생의 마디마다 스며든 기억의 자락들이 천 위에 포개지는 순간, 그것은 어떤 격식보다 찬란한 예복이 된다. 수의는 마지막 순간에도 온기를 잃지 않는, 가장 다정한 위로일지 모른다.


이제 묻고 싶다.


"당신의 마지막 예복은 무엇으로 성장(盛裝)하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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