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후반 마을 형성때부터 돌담 쌓아
2006년 문화재청 국가등록문화유산 지정
3년간 복원사업…옛 담장 기록화사업도
마을 뒤 흐르는 남대천 물맑고 수량 넉넉
360년 된 느티나무 16그루 보호수로 지정

지전마을 돌담은 2006년 문화재청이 지정한 국가등록문화유산이다. 2007년부터 3년에 걸쳐 고쳐 쌓았는데 지금 옛 돌과 새 돌은 꽤나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다.

돌담과 흙돌담이 어우러진 지전마을 고샅길. 담장의 전체 길이는 1300미터 정도다. 높이는 약 1.2m에서 1.6m 정도로 위압적이거나 미로의 느낌은 없다.
정갈한 돌담길이다. 흙과 강돌을 한 줄씩 쌓아올린 토석담장이 길고, 돌만 가지고 성채를 쌓듯 오밀조밀 튼튼하게 쌓아올린 담장도 어우러진다. 커다란 감나무가 담장 밖으로 가지를 늘어뜨린다. 담쟁이가 담을 기어오르고 호박넝쿨이 돌담을 넘는다. 그리고 담장에 기대 접시꽃이 피었고 분홍 낮달맞이 꽃도 피었고, 봉숭아도 있고, 태양도, 평화도 있다. 돌담을 무지개로 건너지르는 청포도 터널에서 경운기가 쉰다. 고양이 한 마리가 재바르게 골목을 가로지른다. 아무도 스치지 않았다. 달그락 소리하나, 라디오 소리 하나도 없었다. 오직 새소리와 물소리와 좋은 냄새만이 햇살처럼 내렸다.

마을 앞에는 비옥한 들이 넓다. 그래서 다른 마을이 싸리나무울타리를 두를 때 이곳은 흙돌담을 쌓을 정도로 부유했다고 한다.
◆ 지전마을 옛 돌담길
지전마을은 무주 설천면 길산리의 자연마을이다. 길(吉)한 땅이라 하여 길산리(吉山里)라고 했다는데, 예부터 흙이 황토라 비가 오면 농사일을 못할 정도로 질어서 '질번지' 또는 '길산'으로 불렸다고 한다. 지전 마을은 지초(芝草)가 많이 나는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지초는 천연 염색이나 약재로 많이 쓰이는 여러해살이풀인데 지금 지전마을에서 지초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마을 뒤로 남대천이 흐른다. 마을 앞에는 비옥한 들이 넓다. 그래서 다른 마을이 싸리나무울타리를 두를 때 이곳은 흙돌담을 쌓을 정도로 부유했다고 한다. 마을이 언제 생겼는지는 모른다. 조선 숙종 때의 문헌에 지전이라는 지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 대략 17세기 후반 경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하는데, 최초의 정착 때부터 마을 사람들이 의기투합해 담장을 쌓았다고 전한다. 그렇게 수백 년 이어온 지전마을의 돌담은 2006년 문화재청이 지정한 국가등록문화유산이다.
담장의 전체 길이는 1300m 정도다. 높이는 약 1.2m에서 1.6m 정도로 위압적이거나 미로의 느낌은 없다. 고샅길 너비도 넉넉한 편이다. 돌은 마을 뒤를 흐르는 남대천에서 지게로 옮긴 것이란다. 자연에서 찾은 돌은 색과 모양이 제각각이다. 흙돌담의 보존가치를 높이기 위해 2007년부터 2009년까지 3년에 걸쳐 군 차원에서 복원사업이 진행되기도 했었다. 15여년이 지난 지금 옛 돌과 새 돌은 꽤나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다. 2022년경에는 '옛 담장 기록화사업'을 실시했다고 한다. 옛 담장에 대한 자료수집과 문헌조사, 측량 및 정밀실측조사, 3D스캔 작업 등을 통해 원형을 보존할 수 있는 전산화된 자료를 갖춘 것이다. 정부가 관리하다보니 집수리도 제대로 할 수 없지만 마을주민들의 자긍심은 대단하다고 한다.
옛날에는 흙돌담 위로 초가지붕이 소복소복 쌓여 있었을 것이다.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 푸른 동산 만들어/ 알뜰살뜰 다듬세.' 대한민국 어디서나 이 노래가 울려 퍼졌던 1970년대, 지전마을의 초가지붕도 사라졌다. 지금은 개량 기와집 형태의 오래된 가옥이 다수다. 산장 같은 이층집도 보이고 옛집을 아기자기하게 가꿔 만든 카페도 있다.

마을에는 개량 기와집 형태의 오래된 가옥이 다수다. 옛집을 아기자기하게 가꿔 만든 카페 '나무와 그릇'은 지전마을의 핫 플레이스다.

수형 예쁜 향나무 한 그루는 2002년 마을회관을 짓고 무주 군수가 기념으로 심은 것이다. 그 옆의 큼직한 바위는 마을이 남대천 위의 배 형상이라 큰 돌로 꾹 눌러 놓았다 한다.

고샅길 너비도 넉넉한 편이다. 돌담을 무지개로 건너지르는 청포도 터널에서 경운기가 쉰다.
담장 안팎으로 사과나무, 대추나무, 포도나무, 호두나무 등의 과실수들과 깻잎, 고추 등의 온갖 채소가 풍성하게 자란다. 좋은 냄새가 난다. 풀과 꽃, 과일과 채소, 오래된 강돌을 뒤덮은 초록 이끼, 섬세한 잎들, 수목의 뿌리로부터 솟은 땅의 숨, 그리고 고양이의 걸음걸이와 햇빛과 새들의 지저귐과 고요가 모두 뒤섞인 냄새다. 긴 돌담 모서리에 돌창고가 내달려 있다. 지초로 물들인 듯 자줏빛으로 녹슨 문을 똑똑 두드려 본다. 벚꽃 그림이 그려진 빈 창고를 코가 납작해지도록 들여다본다. 마을회관 뒤편의 커다란 창고를 어여쁘게 바라본다. 창고를 좋아하는 병에는 약이 없다.
마을회관 맞은편에 수형 예쁜 향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2002년에 마을회관을 짓고 무주 군수가 기념으로 심은 것이다. 그 옆에 물개 같기도 하고 뱃머리 같기도 한 큼직한 바위가 놓여 있다. 마을이 남대천 위의 배 형상이라 큰 돌로 꾹 눌러 놓았다 한다.

마을 뒤 남대천에 강돌이 많다. 물길 저편에는 소백산 줄기가 병풍처럼 둘러서 있다.
◆ 마을을 감싸 흐르는 남대천
남대천은 동쪽에서 흘러 서쪽으로 간다. 무풍에서 발원해 북류하면서 설천면을 지나 서쪽으로 무주읍을 관류한 뒤 금강에 유입되는데, 설천을 지나는 동안 물길은 전형적인 감입곡류를 보여준다. 지전마을은 그 곡류하는 물가에 자리한다. 물길 저편에는 소백산 줄기가 병풍처럼 둘러서 있다. 산 너머는 영동이다. 느닷없이 회색구름을 띄운 먼 동쪽의 짙푸른 산은 민주지산일 것이다. 물소리 쟁쟁하다. 수량은 넉넉하고 물빛이 맑아 속이 다 들여다보인다. 물놀이하기 좋아 보이는데 물놀이 금지구역이라는 표지판이 갸우뚱 서 있다. 강돌이 많다. 그 많은 돌이 담장이 되었어도 여전히 돌이 많다. 달뿌리풀도 성성하다. 기는줄기는 사방으로 뻗어 있지만 아무래도 물을 향해 전력을 다해 포복전진 하는 것 같다. 앞을 더듬어 전진하는데 촉각을 곤두세운다. 잠시라도 홀리면, 강돌에 발목을 접질리거나 달뿌리풀에 턱 걸려 꼬꾸라질 것이 분명하다. 하여 장쾌한 초록으로 감싸인 채 오래 돌 위에 서 있다. 물소리만 들리는 아늑하고 아득한 시간이다.

둑길 아래에 엄청난 느티나무들이 늘어서 있다.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는 16그루의 느티나무로 남대천이 마을로 범람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제방 아래에 심었다고 전한다.

느티나무 아래 보호수 표지석이 놓여 있고,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다. '나는 당신을 위해 이렇게 서 있습니다.'

조용하고 은은한 풍경의 한가운데서 낮은 비명소리가 들린다. 곧 까만 피조물과 눈이 마주친다. 멋진 뿔을 가진 염소가 웃고 있다.
둑길 아래에 엄청난 느티나무들이 늘어서 있다.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는 16그루의 느티나무들이다. 나무들은 마을을 보호하는 숲정이 당산 역할을 했던 것으로, 남대천이 마을로 범람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제방 아래에 심었다고 전한다. 한그루 느티나무 아래 까만 오석의 보호수 표지석이 놓여 있다. 이 나무는 1982년에 보호수로 지정됐다. 당시 수령이 320년이니 이제 360년 정도다. 높이는 15m, 둘레는 6.3m다. 몇 명이 손에 손을 잡아야 안을 수 있을까. 아래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다. '나는 당신을 위해 이렇게 서 있습니다. 이 땅에 일어났던 모든 재난 속에서도 오직 당신을 위해 이렇게 의연히 서 있습니다. 앞으로 더욱 아끼고 사랑해 주신다면 당신과 당신의 후손들 곁에서 억겁을 살으렵니다.'
둑길은 청길강변로다. 설천면 청량리 반디랜드 앞에서부터 길산리 지전마을까지의 강변길이다. 간간이 차가 지나가지만 자전거 우선 길이다. 산뜻한 노랑의 화장실도 갖춰놓았다. 길가는 온통 벚나무다. 벚나무 아래 화강석 벤치가 마을도 보고 물도 본다. 조용하고 은은한 풍경의 한가운데서 낮은 비명소리가 들린다. 뭐지, 하는 순간 소리는 멈추었고 곧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까만 피조물과 눈이 마주친다. 멋진 뿔을 가진 염소가 웃고 있다. 너는 이름이 뭐니. 너는 말이 없고, 아무도 스치지 못해 무엇도 물을 수 없구나. 마을에서 나는 좋은 냄새에 몇 가지 재료를 더해야겠다. 천변의 강돌과, 쟁쟁한 물소리와, 당신을 위해 서 있는 느티나무와, 비로드 같은 염소의 웃음과, 모르는 사람들과, 나의 애정까지.
글·사진=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긴 돌담 모서리에 돌창고가 내달려 있다. 철문은 지초로 물들인 듯 자줏빛으로 녹슬어 있다.
>>여행정보
대구 성서에서 성주를 거쳐 무주로 가는 30번 국도를 타고 계속 간다. 나제통문을 통과하자마자 우회전해 직진, 반디랜드 지나 1.8㎞ 정도 가면 상길 버스정류장이 있다. 정류장 옆길로 우회전해 끝까지 들어가면 지전마을이다. 마을회관 앞이나 남대천변에 주차하면 된다. 마을 안 카페인 '나무와 그릇'은 화요일, 수요일 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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