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닫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네이버
    밴드
  • 네이버
    블로그

https://m.yeongnam.com/view.php?key=20250728029515830

영남일보TV

[박혜경의 사람학교]천천히, 그리고 함께

2025-07-29 06:00





박혜경 한동대 부총장

박혜경 한동대 부총장

"빨리, 빨리!" 외국인들이 한국어를 배울 때 가장 먼저 익히는 말이다. 그만큼 우리는 늘 서둘러야 했다. 빨리 판단하고, 빨리 적응하고, 빨리 도착해야만 성공이라 믿었다. 뒤처지면 낙오자가 되는 것 같았기에, 백화점 매대든 마트 타임세일이든 우리는 마치 국가대표 육상선수처럼 몸을 던졌다. 그렇게 우리는 속도에 인생을 맡긴 채 숨가쁘게 달려왔다. 하지만 빠름이 늘 정답이었을까?


한국은 경제대국 10위권이지만 동시에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 행복도 최하위라는 역설적인 성적표를 안고 산다. 경쟁과 비교라는 또 다른 이름의 '빠름'이 우리 삶을 지배한 결과다. 다행히 이제는 속도전에 물음표를 던지고, 다른 걸음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조금씩 늘고 있다. 낙오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삶에서 더 본질적인 것을 지키려는 결단이다. 그들은 비로소 묻기 시작했다. "나는 누구와, 어디를 향해 걷고 있는가?"


얼마 전, 스타트업계에서 누구보다 바쁘게 일하던 제자가 회사를 그만두고 쉼을 선택했다. 그는 탈진 상태였다. 동료와의 대화는 줄고 마음 둘 곳도 없었다. 그는 동네 주민들과 함께 걷고 이야기하는 '슬로워크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그 변화는 놀라웠다. 사람에 대한 신뢰를 회복했고, 오래 함께 일할 파트너들을 얻었다. 생각도 달라졌다. "이제는 누가 빨리 도착했느냐보다, 누가 끝까지 곁에 있어주는지가 더 중요해졌어요."


변화는 제도 속에서도 감지된다. '육아휴직 제도'는 단순한 휴식이 아니다. 성과 중심 사회에서 아이와 함께 천천히 자라는 시간을 허락하는 선택이다. 한 아빠의 고백이 인상 깊었다. "아이의 속도에 맞춰 하루를 보내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만, 인생에서 가장 깊이 있는 걸음을 배우는 시간이기도 해요." 빠른 승진보다 '함께 자라는 시간'을 선택하는 이들이 조금씩 늘고 있다. 우리 사회는 아이와, 배우자와, 팀원과 함께 천천히 가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혼자 가면 빨리 가고, 함께 가면 멀리 간다." 미국 친구 집 주방에 걸려 있던 문구다. 맞벌이 부부와 네 자녀의 가사분담을 독려하려 걸어둔 문장이 어느새 가족의 삶을 이끄는 가훈이 되었다고 했다. 아프리카 부족의 격언이라지만, 오늘 우리에게도 깊은 울림을 준다. 진짜 중요한 건 속도가 아니라 방향, 그리고 함께 걷는 동행이다. 빠름은 효율을 주지만, 함께 천천히 걷는 길은 관계를 남긴다.


뒤처진 사람을 기다려주기 위해 자신의 걸음을 늦추는 일. 그것은 나약함이 아니라 용기다. 빠름을 내려놓을 수 있는 여유, 사람을 선택할 수 있는 힘. 함께 천천히 걷는다는 것은 누군가의 속도와 삶을 존중한다는 뜻이다. 속도를 늦출 줄 아는 사람만이 길가에 핀 꽃향기를 맡을 수 있다.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그 길을 걷는다면, 그것만으로도 인생은 충분히 복되다.


내가 살아온 일생이


험하고 외로웠던 길이라지만


손을 잡고 같이 간 친구가 있었다면


그것 하나로 아름다운 여행이 아니던가


-나태주, '너와 함께라면 인생도 여행이다'


시인의 담담한 고백은 우리가 잊고 사는 인생의 본질을 일깨워준다. 이제는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주자. 누군가와 나란히 걷고 있다면, 우리는 이미 잘 가고 있는 중이다. 인생은 혼자 앞서가도록 설계된 길이 아니다. 나란히 걷고, 때로는 기다리고, 함께 도착할 때 비로소 인생은 아름다운 여행길이다.


오늘 당신이 택한 느린 걸음이 곁에서 함께 걷는 누군가에게 오래도록 남을 위로이자 잊지 못할 선물이 되기를.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오피니언 인기기사

영남일보TV

부동산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