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멈췄던 원전 시간, 다시 선택의 기로에 선 영덕”
정부 전력계획에 신규 원전 포함…산불 피해와 침체된 지역경제 속 영덕군의 숙고와 주민 여론 변화

한때 천지원전 예정지로 지정고시됐던 영덕 석리마을이 지난 3월 발생한 초대형 산불로 마을 전체가 큰 피해를 입었다.(영덕군 제공)
지난 3월, 정부가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전기본)에 신규 원전 2기 건설을 포함시키면서 경북 영덕군이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한때 천지원전 건설 예정지로 지정·고시됐던 영덕은 2017년 탈원전 정책 이후 건설계획이 백지화되며 깊은 상처와 후유증만 남겼다. 시간이 흘러 변화된 에너지 환경과 전력 수요 증가 그리고 초대형 산불로 엄청난 피해를 겪으면서 지역 여론은 다시 원전 수용 쪽으로 눈길을 보내고 있다. 과거의 좌절과 아픔을 넘어 다시금 국가 에너지 정책의 전면에 선 영덕군은 중대한 갈림길에 서 있다.
또다시 불려나온 영덕, 원전 재논의 분위기는…
정부의 원전 정책 전환을 둘러싼 지역별 수용성 문제는 지난 2003년 부안 사태에서 뚜렷이 드러났다. 당시 전북 부안에서는 정부가 일방적으로 방사성폐기물처리장(방폐장)을 설치하려 하자 격렬한 주민 반발이 일어났고 결국 사업은 백지화됐다.
이후 노무현 정부는 수용성 확보를 위해 2005년 방폐장 특별법을 제정하고 2006년 전북 군산시와 경북 포항시, 영덕군 등 전국 4개 시·군에서 주민투표를 실시해 경주시를 최종 방폐장 부지로 선정했다. 이어 정부는 수천억 원 규모의 지역 지원사업을 집행하며 정책 추진의 모범사례로 평가 받았다.
방폐장 유치에 실패했던 영덕군은 지역발전을 앞세워 2012년 자발적으로 신규원전 유치에 나섰고 같은 해 9월 천지원전 예정 부지로 지정·고시되면서 정부 정책과 보조를 맞췄다. 이 과정은 비록 주민투표 방식은 아니었지만 설명회와 여론조사, 군의회 및 각급 지역단체들의 동의를 바탕으로 추진돼 비교적 높은 수준의 지역 수용성을 보여준 계기로 기록됐다.
이후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은 토지 매입과 부지 정비, 환경조사 등 사전 준비 작업에 본격 착수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지역내 찬반 갈등이 발생하기도 했지만 정부의 정책적 지원속에 큰 걸림돌 없이 지역 발전의 큰 그림을 그리며 주민들의 기대감을 높였다. 이 당시 영덕군의 땅값상승율이 세종시처럼 한때 전국 최고수준을 나타내면서 주목을 끌기도 했다.
그러나 2017년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선언으로 천지원전 건설 계획이 전면 중단되면서 지역상황은 급변했다. 이미 매입된 부지와 예산, 개발 계획은 기약없이 방치됐고 지역에서는 건설계획 지연에 따른 갈등으로 이어졌다. 주민들은 정부 정책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깊은 실망감을 나타냈고 예정지로 고시됐던 원전 부지 주변 지역은 별다른 대안 없이 지금까지 시간만 흘려 큰 상처만 남겼다.

천지원전 예정구역 정부 고시 이후 6년동안 개발이 묶였던 영덕읍 석리 주민들이 탈원전으로 백지화 되자 지난 2018년 재산권 보상을 요구하는 집회를 수차례 가졌다.(영남일보 DB)
탈원전의 상처와 그림자, 다시 빛을 찾을 수 있을까
2022년 출범한 윤석열정부는 이듬해부터 원전 정책을 재가동하면서 또 다시 영덕군이 수면위로 올랐다. 정부는 11차 전기본에 총 2.8GW(기가와트) 설비 용량의 신규원전 2기를 오는 2037∼38년까지 도입하고 2035∼36년에는 '차세대 미니 원전'인 SMR을 0.7GW 규모로 처음 도입하는 계획을 담았다.
지난 10년간 원전건설은 전기본에서 빠졌지만 국내에서도 반도체, 데이터센터 등 전력 수요 폭증에 따른 안정적인 전원의 확보 필요성 확대 등 산업 환경이 변화하자 도입이 다시 추진됐다. 특히 정부는 현재 추진중인 용인 반도체클러스터에 수도권 전력 수요의 4분의 1에 달하는 10GW 이상 대규모 전력과 전력인프라가 필요할 것으로 예상했다. 10GW는 한국형 신규원전(APR-1400) 6~7기에 해당하는 발전량이다.
여기에 더해 이재명 대통령은 경기 남부지역에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 조성을 통해 '세계 반도체 산업 중심지 육성'을 경기도 대선공약 제1호로 내세웠다. 공약의 핵심은 성남, 수원, 용인, 화성, 평택, 안성 등 경기 남부지역에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를 조성해 연구개발부터 설계, 테스트, 생산까지 완결형 생태계를 구축하겠다는 것이다.
기억과 기대 사이, 영덕의 또 다른 도전…산불 피해와 인구감소 속 현실적인 해답 모색
현재 영덕군은 인구감소와 지역경기 회복은 물론 부족한 재정 확보 등의 여러 어려움에 처해있다. 무엇보다 지난 3월 발생한 초대형산불이 영덕군 해안가까지 덮치면서 한해 예산의 절반에 달하는 피해액이 발생해 재정악화의 결정적 이유가 됐다.
이로인해 앞으로 수년 이상 걸리는 피해 복구에 필요한 지방비 매칭 규모도 영덕군이 감당하기 힘들만큼의 엄청난 군비가 필요하다는 분석도 확인됐다. 그럼에도 영덕군은 현재 공식적으로 정부 계획에 담긴 신규원전과 관련해서는 입을 꼭 다물고 있다. 영덕군의 한 간부는"하루아침에 바뀐 원전정책으로 엄청난 지역갈등과 혼란을 겪었는데 언제 또다시 바뀔지 모른다는 생각은 여전하다"라며 경계했다.
이 같은 분위기는 과거 방폐장과 천지원전 등 정부정책에 적극 호응했음에도 갑작스러운 탈원전정책에 대한 충격이 워낙 컸기 때문이다. 여기에 정부로부터 받은 380억원의 원전 지원금마저 지난해 전액 회수되면서 영덕군이 가졌던 억울함도 아직 남아있는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과거 원전유치로 인한 정책적 혜택을 어느정도 경험해 봤던 영덕군으로서는 원전이 단순한 산업시설 유치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데는 충분히 공감하고 있다. 다만 주민 여론은 과거와 달리 상당히 우호적인 분위기인 것으로 나타났다.

붉은선으로 표시된 구역이 지난 2012년 지정고시된 천지원전 건설 예정지 이다.(영남일보 DB)
초대형 산불발생 전인 지난 3월 영덕의 한 시민단체가 여론조사 전문기관에 의뢰해 실시한 전화여론조사(조사대상 500명)에서 원전건설에 찬성이 60% 중반을 넘었고 반대가 약 18% 인것으로 알려졌다. 조사에서 '지역 경제의 활성화'가 원전건설 찬성의 주된 이유가 됐다.
실제로 산불 피해지역의 한 주민대표는 당시 현장을 방문했던 한덕수 대통령권한대행에게 "어차피 산불피해지역을 복구하는데 큰 돈을 들이는데 그 돈으로 이곳에 원전을 짓게 해달라"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리고 천지원전 유치 당시 긍정적 의견을 밝혔던 A씨(영덕읍. 65)도 "주변에서 갈수록 침체되는 지역경제와 인구감소를 막기 위해서라도 이제는 해야 한다는 얘기들이 상당히 많다"라고 말했다.

석리마을 이미상 이장이 초대형 산불 피해로 마련된 임시마을회관 앞에서 영남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는 모습(영남일보 DB)
■이미상 영덕읍 석리 이장 인터뷰
마을 전체가 천지원전 예정지로 지정·고시됐던 영덕읍 석리는 탈원전의 대표적 피해지역이다.
당시 주민 100%가 원전 건설에 동의했지만 탈원전 이후 사유재산권 보상 등의 문제로 수개월 동안 항의 집회를 가질 만큼 큰 휴유증을 남겼다. 이 마을은 지난 3월 발생한 초대형 산불이 마을전체를 덮치면서 68가구 중 54가구의 주택이 전소되는 큰 피해을 입었다. 석리가 고향인 이미상 이장(63)은 임시 마을회관에서 원전에 대한 주민입장을 밝혔다.
이 이장은"탈원전 정책 이후 우리 마을은 철저히 소외되면서 주민들의 아픔조차 돌보지 않았다"라고 회상하며 당시 정부를 비난했다. 이어"그렇지만 우리 지역의 발전과 미래를 위한다면 그 어떤 사업이라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 현재 주민들의 공통된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는 정부의 신규원전 계획에 대해"과거 원전유치와 탈원전 과정을 겪으면서 주민들 생각이 많이 변했다"라고 하면서 "우리들이 생각한 기준과 조건에 맞는지 반드시 확인한 후 결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석리 마을의 피해 주민들은 3개월이 넘는 대피소 생활을 끝내고 최근 새로 만든 임시주택 단지로 모두 이주했다.

남두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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