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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회 달서책사랑 전국주부수필공모전] 박수진의 ‘세상에서 가장 느린 독서’ 전문

2025-08-28 06:00
제16회 달서책사랑 전국수필공모전에서 박수진씨의 '세상에서 가장 느린 독서'가 대상의 영예를 안았다. <게티이미지뱅크>

제16회 달서책사랑 전국수필공모전에서 박수진씨의 '세상에서 가장 느린 독서'가 대상의 영예를 안았다. <게티이미지뱅크>

"엄마, 여기 뭐라고 써 있어?"


아이의 짧은 질문에, 나는 책장을 조용히 덮고 아이를 바라보았습니다.


그 말 한마디가, 내 안에서 조용히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말은 짧았지만, 그 안엔 많은 것이 담겨 있었어요.


이 아이와 함께 걸어온 시간이, 그 문장 속에 다 담겨 있는 듯했습니다.


아이를 품에 안았던 순간, 나는 그저 평범한 미래를 떠올렸습니다.


유치원에 가고, 친구들과 놀고, 자연스럽게 자라는 모습 말이에요.


하지만 현실은 내가 그리던 그림과는 달랐습니다.


아이는 단어보다 그림을 좋아했고, 글자를 배우는 속도도 또래보다 많이 느렸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좀 늦는 아이겠지" 하며 넘겼지만,


마음 한켠에서는 자꾸 불안이 피어났습니다.


결국 '경계선 지능'이라는 진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속 무언가가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죠.


그날 밤, 아이가 잠든 방문 앞에 조용히 앉았습니다.


아무 말 없이 아이를 바라보며, 참았던 눈물을 삼켰습니다.


속으로 조용히 이야기했어요.


"미안해, 엄마가 조급했어."


◆아이의 걸음에 맞추기로


그 후 나는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아이보다 앞서가려는 마음을 내려놓기로.


다그치지 않고, 아이의 속도에 발을 맞추기로 했습니다.


그 첫 시작은 '책'이었습니다.


책을 통해 아이가 감정을 알고, 세상을 느끼고, 자기 자신을 이해하길 바랐습니다.


하지만 시작은 쉽지 않았습니다.


글씨가 많다고 투덜대기도 했고, 금세 책을 덮어버리기도 했습니다.


"재미없어."


"이거 너무 어려워."


그럴 때마다 나는 숨을 고르며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하루 한 문장, 한 그림이라도 괜찮다고 스스로를 다독였죠.


처음엔 동물 그림책이나 소리나는 책으로 시작했어요.


글자를 모르면 그림을 보고, 이해하지 못해도 느낌을 나누자고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가 '강아지 똥'이라는 책을 들고 와 말했습니다.


"이거 또 읽어줘. 똥이 꽃 도와주는 거잖아."


그때 아이의 눈빛이 반짝였습니다.


단순히 이야기를 이해한 것이 아니라, 그 안의 감정을 마음으로 받아들인 것 같았어요.


그 순간은 우리에게 아주 특별한 기적이었습니다.


◆책을 통해 열리는 마음


그날 이후, 우리는 매일 저녁 함께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같은 책을 반복해서 읽는 날도 많았고,


어려운 내용은 그냥 그림만 보고 넘기기도 했습니다.


나는 "왜 또 읽어?" 대신


"이번엔 어떤 부분이 좋았어?"라고 물었습니다.


조금씩 아이의 마음이 열린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어느 날 아이가 물었습니다.


"이 친구는 왜 울었을까? 나도 그런 기분 들 때 있어."


말이 서툴렀던 아이가, 감정을 입 밖으로 꺼낸 순간이었습니다.


책 속 이야기를 빌려 자신의 마음을 전하기 시작한 거죠.


그렇게 아이는 책을 통해 스스로와 마주하기 시작했습니다.


학교에서도 작은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아직은 말이 빠르진 않았지만, 친구에게 다가가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용돈 주세요'라는 책 알아? 병관이랑 나랑 좀 비슷하대."


아이의 조심스러운 한 마디에 친구가 웃어주었고,


그때 아이가 지은 미소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납니다.


◆책장 너머로 자라나는 아이


책 읽기는 집 안을 넘어 아이의 세계를 조금씩 넓혀줬습니다.


이제는 도서관에 가면 먼저 책장 앞에 앉아 책을 고릅니다.


낯선 단어를 만나도,


"이건 무슨 뜻이야?"라며 스스럼없이 묻고,


"다시 읽어볼게."라고 용기 있게 말합니다.


그렇게 아이는 한 글자, 한 문장을 읽어가며 자신을 넓혀갑니다.


비록 속도는 느릴지라도,


분명하고 따뜻하게 자라나고 있다는 걸 느낍니다.


◆느림은 아이만의 방식


우리 집 책장은 작지만, 그 안엔 아이의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손때 묻은 책, 페이지 사이에 끼운 낙서, 잠들며 베고 있던 자국까지.


그 모든 것이 아이와 나의 기록입니다.


"엄마, 이거 관효한테도 읽어주고 싶어."


책을 다 읽은 뒤 그렇게 말하는 아이를 보며, 나는 울컥했습니다.


책이 이제는 단순한 읽기의 도구가 아니라,


사람과 연결되는 다리가 되었다는 것을 실감했기 때문이죠.


나는 그 순간 깨달았습니다.


아이의 느림은 결코 약점이 아니라고.


그 느림 속에는 오래 머무르고, 깊이 바라보는 힘이 있었던 겁니다.


◆함께 걷는 길, 그리고 나의 자리


세상은 늘 빠르기를 원합니다.


더 빨리 익히고, 더 빨리 말하고, 더 빨리 성장하라고요.


하지만 우리 아이는 느리게 걷습니다.


멈추지 않지만,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이제 나는 압니다.


세상에서 가장 느린 독서가,


어쩌면 가장 멀리 나아가는 사랑의 방식일 수 있다는 것을요.


오늘도 아이는 책을 펼칩니다.


어떤 날은 한 장만 읽고, 어떤 날은 끝까지 다 읽습니다.


속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책을 통해 아이가 매일 조금씩,


자신을 더 알아가고 있다는 그 사실이 전부니까요.


그리고 나는 그 곁에서,


진짜 엄마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천천히, 아이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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