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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와 세상] WTO는 멈췄고, FTA는 흔들린다

2025-09-26 06:00
임규채 경북연구원 사업지원본부장

임규채 경북연구원 사업지원본부장

최근 우리는 자유무역협정(Free Trade Agreement·FTA)에 대한 믿음을 계속 가지고 있어야 할지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다. 미국은 언제든지 자국 산업을 최우선 가치로 내세우며 자국을 보호한다는 입장으로, 이미 체결된 무역 협정의 엄격한 약속조차도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재해석하거나 뒤집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한편 유럽연합은 탄소국경조정제도(Carbon Border Adjustment Mechanism·CBAM)라는 새로운 무역장벽을 세워 단순한 환경 규제를 넘어 기후변화 대응이라는 명분 아래 무역을 전략적 정책 도구로 활용한다. 이처럼 주요 선진국들은 자국 산업의 경쟁력 강화와 글로벌 시장 주도권 확보를 위해 국제 규범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거나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세계 무역 질서의 불확실성과 긴장이 심화되고 있다. 겉으로는 자유무역협정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으나, 실제 무역 현장은 힘의 논리와 정치적 이해관계가 지배하고 있으며 결국 자유무역이 국가 간 절대적 신뢰의 증표라는 믿음은 무의미한 것으로 드러났다.


최근 국제 분쟁은 세계 질서의 허상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단순한 지역 분쟁에 그치지 않고 세계 곡물과 에너지 시장을 뒤흔들었고, 중동 지역의 갈등은 원유 공급망을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과거에는 군사적 갈등과 경제 질서를 서로 다른 차원으로 구분하는 시각이 지배적이었으나, 오늘날 상황은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무역 자체가 전쟁이고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무역은 곧 전투이기 때문이다. 결국 국제 경제는 더 이상 독립적인 체계로 존재하지 못하고, 정치와 안보 논리에 종속된 구조로 재편되고 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갈등을 완충하거나 조정해야 할 국제 제도적 장치마저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세계무역기구(World Trade Organization·WTO)는 분쟁 조정기능을 잃었고, 다자 무역 규범의 신뢰도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국제 협력보다는 블록화된 동맹과 자국 우선 정책을 선택하고 있다. 자유무역의 신화는 무너지고, 보호무역과 각종 규제 강화가 일상화되고 있다. 그러나 상호의존성은 여전히 깊다. 반도체 공급망, 기후위기 대응, 에너지 전환과 같은 문제는 협력 없이는 해결 불가능하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지역 및 산업 단위의 전략적 협력이 새로운 국제 질서의 대안적 형태로 점차 부상하고 있다. 결국 무너진 신뢰의 공백을 불완전하지만 필연적인 협력이 대신 채울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이제 특정 국가나 단일 협정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방식으로는 급변하는 국제 질서 속에서 생존과 성장 모두 불가능하다. 한국은 무엇보다 공급망과 수출 시장을 다변화하고, 무역을 단순한 경제 문제가 아니라 국가 안보의 핵심 축으로 인식하고 접근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산업정책과 외교정책을 따로 운용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산업정책은 곧 외교정책이고, 외교정책은 산업정책을 뒷받침하는 양날의 칼이 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 환경·디지털 분야에서 등장하는 새로운 무역장벽에 끌려가기보다는, 국제 표준을 만드는 과정에 선도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만약 뒤처진다면 한국은 늘 다른 나라가 만든 규범과 기준에 끊임없이 종속될 수밖에 없다.


오늘날의 국제 경제 질서는 더 이상 절대적인 신뢰에 기반하지 않는다. 이제 중요한 것은 믿을 수 있는가 보다는 불완전한 신뢰 속에서 생존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자유무역의 신화를 붙잡는 대신, 불확실성을 관리하고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주체로 나서야 한다. 한국의 미래는 바로 이 선택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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