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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응상의 천 개의 도시 천 개의 이야기] 폴란드 크라쿠프 <상>

2025-10-16 16:17
얀 마테이코 광장. 중간의 기마상이 그룬발트 전투 기념비이며, 오른쪽 건물이 얀 마테이코 미술 아카데미이다. 멀리 바르바칸 성벽 요새와 플로리안 게이트 탑도 보인다.

얀 마테이코 광장. 중간의 기마상이 그룬발트 전투 기념비이며, 오른쪽 건물이 얀 마테이코 미술 아카데미이다. 멀리 바르바칸 성벽 요새와 플로리안 게이트 탑도 보인다.

내가 폴란드라는 나라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초등학교 5학년 교과서에 실렸던 퀴리 부인 이야기 덕분이었다. 어렴풋하지만 나라 잃은 슬픔에 관한 내용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크라쿠프라는 도시를 알게 된 것도 199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덕분이었다. "정곡을 찌르는 명징한 언어, 풍부한 상징과 은유, 절묘한 우화와 패러독스, 간결하면서도 절제된 표현과 따뜻한 유머"(예스24 작가파일)를 가진 그의 독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폴란드 중서부의 작은 마을 쿠르니크에서 태어나 여덟 살 때인 1931년 폴란드의 옛 수도 크라쿠프로 이주하여 평생을 그곳에서 살았고, 그곳의 오래된 명문 야기엘론스키 대학교를 다녔다. 경남 의령에서 태어나 10살 때 대구로 이주하여 지금까지 살고 있고, 이곳의 대학에서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는 나로서는 상당한 동질감을 느꼈던 것 같다. 어쨌든 노벨상을 받은 두 여인 때문에 나는 폴란드라는 나라를 알게 됐고, 크라쿠프라는 도시를 가보고 싶었다.


폴란드는 영토가 상당히 광대하여 북쪽으로는 발트해에 이르며, 남쪽으로는 카르파티아 산맥에 접하고 있다. 북동쪽으로는 리투아니아와 러시아의 월경지인 칼리닌그라드가 있으며, 동쪽으로는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남쪽으로는 슬로바키아와 체코, 서쪽으로는 독일이 자리하고 있다. 폴란드는 근현대사의 온갖 비극을 고스란히 떠안으며 1990년에야 민주화가 이루어진 나라이다. 수도 바르샤바는 한때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으로 초토화됐다. 그나마 바르샤바의 과거를 유추할 수 있는 곳이 폴란드 제2의 도시 크라쿠프이다.


크라쿠프 얀 마테이코 광장의 그룬발트 전투 기념비. 왼쪽 붉은 벽돌 건물이 연 마테이코 미술 아카데미이다.

크라쿠프 얀 마테이코 광장의 그룬발트 전투 기념비. 왼쪽 붉은 벽돌 건물이 연 마테이코 미술 아카데미이다.

500여 년간 폴란드의 수도이자 문화 중심지였던 크라쿠프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의 주둔지였다. 역설적이지만 그래서 도시는 무사할 수 있었다. 옛 모습을 간직한 구시가 일대가 온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도시의 역사는 4세기까지 거슬러 가지만 전면에 등장한 시기는 700년경, 지역 부족들이 연합하여 세운 비스툴루나 시기부터이다. 10세기 말에는 피아스트 왕조의 통치 아래 폴란드에 편입됐고, 1000년경에 주교 관할권이 부여됐다. 그 이후 1040년부터 마지막 야기에우 왕조가 몰락하면서 정치 중심지가 바르샤바로 옮겨간 1596년까지 약 550년간 폴란드의 수도였다. 현재 인구는 약 80만 명이며, 1978년에 구시가지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도시 첫인상은 지적이고 세련됐다. 쉼보르스카 외에도 코페르니쿠스, 교황 요한 바오르 2세 등 이 도시 출신의 명사들 때문이리라. 하지만 나치 침공 당시 수많은 유태인을 구출한 필부 쉰들러나 나치의 인질을 자처하면서까지 도시의 파괴를 막아낸 시장 스타니스와프 클리메츠키 같은 이들이 이 도시를 진정 품위 있게 만든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크라쿠프의 인상은 이들의 시간과 역사가 함께 만들어낸 것이다. 그 시간의 때가 묻어 있는 건물을 볼 때마다 자꾸 우리 대구가 떠울랐다. 아지트였던 북성로의 소금창고, 모나미 다방이 생각났다. 오래된 것들을 없애는 것은 우리의 역사를 지우는 것이고 축적된 시간을 소멸시키는 일이다. 그 공간이 사라지면서 나의 기억, 우리의 시간, 대구의 역사가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에 새삼 서러웠다.


크라쿠프의 구시가지 입구인 플로리안 게이트. 이 게이트를 지나면 얀 메테이키 광장이 나온다.

크라쿠프의 구시가지 입구인 플로리안 게이트. 이 게이트를 지나면 얀 메테이키 광장이 나온다.

크라쿠프의 볼거리는 당연히 구시가지이다. 숙소에서 구시가지 입구인 플로리안 게이트로 방향을 잡았다. 먼저 만난 곳은 얀 마테이키(Jan Matejko) 광장이었다. 구시가지 북단에 남북으로 길게 뻗은 이 광장은 성 플로리안 교회부터 바르바칸(Barbakan) 성으로 이어진다. 광장의 이름이 된 얀 마테이코는 폴란드 국민화가이다. 그러나 정작 광장 중앙에 떡하니 자리하고 있는 것은 웅장한 기마상으로 장식된 그룬발트(Grunward) 전투 기념비이다. 1410년 그룬발트 전투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이 튜턴 기사단을 격파한 것을 기념하여 500주년이 되는 1910년 건립됐다. 당시 기념비는 나치에 의해 파괴됐고, 1976년에 재건됐다. 기마상의 주인공은 폴란드 국왕 브와디스와프 2세 야기엘로이다. 광장의 이름이 된 얀 마테이코의 흔적은 기념비 왼쪽의 '얀 마테이코 미술 아카데미' 건물과 공원 안의 동상으로 남아 있었다.


바르바칸 성벽 요새. 고깔 모양의 탑이 특이하다. 현재 크라쿠프 역사박물관으로 사용된다.

바르바칸 성벽 요새. 고깔 모양의 탑이 특이하다. 현재 크라쿠프 역사박물관으로 사용된다.

광장과 맞닿은 녹지 공간은 플랜티 공원이다. 멀리서도 존재감을 뽐내던 바르바칸 성벽 요새 건물도 이 공원 안에 어울려 있었다. 바르바칸은 15세기 후반에 건축된 도시 방어용 성벽이다. 요새의 규모를 보면 당시 성벽이 얼마나 높고 견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지름 24.4m에 벽의 두께만 3m에 달한단다. 그리고 주위에 30m 깊이의 해자가 있었다. 요새는 고깔모자처럼 생긴 7개의 작은 탑이 시선을 끈다. 대포와 총, 활을 쏠 수 있게 만든 작은 구멍도 130개나 있다. 이런 완벽한 방어 요새는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사례로서, 당시 이 도시의 경제력과 힘을 알게 해준다. 19세기에 성벽 요새 대부분이 철거됐고, 성벽을 둘러싼 해자는 메워져 녹지로 바뀌었다. 이 성벽 요새는 현재는 크라쿠프 역사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구시가지 입구 플로리안 게이트. 바르바칸 성벽과 연결되어 있었던 8개의 성문 가운데 하나였다.

구시가지 입구 플로리안 게이트. 바르바칸 성벽과 연결되어 있었던 8개의 성문 가운데 하나였다.

이 요새를 지나니 곧장 플로리안 게이트가 나타났다. 이 문은 바르바칸 성벽과 연결되어 있었던 8개의 성문 가운데 하나였다. 19세기 성벽 철거 당시 나머지 성문은 모두 사라졌고, 현 구시가지의 입구가 된 플로리안 게이트만 남아 있다. 처음 지어진 시기는 1300년경이며, 성 플로리안 교회 옆에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또 왕이 드나들었다 하여 '영광의 문'이라고도 불렸다. 외교관이나 외국에서 들어오는 귀한 손님들 모두 이 문을 지났다. 단연 눈을 사로잡은 것은 문 위에 우뚝 솟은 거대한 탑이었다. 이 탑은 예나 지금이나 이 도시를 찾는 이방인들에게 경이로움과 함께 위엄을 느끼게 한다. 특이한 것은 당시 성문을 지키고 관리하던 사람은 왕실 군인이 아닌 도시에서 자발적으로 생겨난 길드 구성원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여덟 개 성문은 각각 '제화공의 탑' '마구상의 탑' 등 길드의 업종을 단 별명이 있었다. 18세기부터 성문의 탑들이 철거되기 시작했는데, 당시 탑을 지켜야 한다는 캠페인 덕분에 살아남은 것이 '모피상의 탑'으로 불린 플로리안 게이트이다. 이 게이트를 통과해 보면 안다. 이 탑의 아우라를. 이 탑은 구시가지로 들어가는 나의 마음과 태도를 경건하고 겸손하게 만들었다.


왕의 길로 불리는 플로리안스카 거리. 멀리 성모 승천 성당이 보인다.

'왕의 길'로 불리는 플로리안스카 거리. 멀리 성모 승천 성당이 보인다.

플로리안 게이트에서 구시가를 관통하는 중심대로는 플로리안스카 거리이다. 과거 왕의 대관식 행렬이 지나던 길이었으므로 '영광의 문'과 함께 '왕의 길'로 불린다. 이 길은 성 플로리안 교회에서 시작하여 플로리안스카 거리를 따라 중앙광장과 그로츠카를 거쳐 옛 왕궁 바벨까지 이어진다. 지금은 '왕의 길'에 각종 상점과 기념품 가게, 식당이 줄지어 서 있다. 구시가지의 중앙광장이 도시의 심장이라면 이 길은 심장의 동맥이라 할 수 있겠다. 양쪽으로 늘어선 건물들이 직선의 대로를 만들고, 건물마다 촘촘히 들어찬 가게들이 자꾸 눈을 붙잡는다.


그렇게 기웃거리다 보니 어느새 중앙광장에 도착했다. 리네크 글루프니(Rynek Główny)로 불리는 중앙광장은 13세기에 건설된 유럽에서 가장 큰 광장 가운데 하나이다. 중앙시장 광장으로도 불리는 이곳은 한때 행정과 종교, 무역과 경제의 중심지였다. 성당과 교회는 물론, 품목별 전문시장이 있었고, 지금은 탑만 남았지만 시청도 있었으니, 명실이 상부하다. 현재의 광장은 당시의 모습 거의 그대로라고 하니 더욱 경이롭다.


구시가지의 랜드마크 성모 승천 성당. 13세기 후반 건립된 초기 로마네스크 양식이다.

구시가지의 랜드마크 성모 승천 성당. 13세기 후반 건립된 초기 로마네스크 양식이다.

이 광장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물은 성모 승천 성당이다. 성 마리아 성당으로도 불리는 이곳은 13세기 후반 건립된 초기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높이도 다르고 디자인도 다른 두 개의 첨탑을 가지고 있다. 두 탑은 역할도 달랐다. 오른쪽 낮은 첨탑은 성당의 종탑이며, 왼쪽의 높은 첨탑은 외적 침입이나 화재 발생 시 나팔을 불어 알리는 감시탑이었다. 감시탑에서는 지금도 매시간 정각마다 나팔수가 직접 나팔을 분다. 그런데 가만 들어보면 연주가 중간에 끊긴다. 여기에는 전설이 전해온다. 1241년 타타르족에게 성이 포위됐을 때 첨탑에서 보초를 서던 나팔수가 타타르의 침입을 알리는 나팔을 불다가 화살에 맞아 죽었다. 지금의 나팔 연주는 그를 기리는 의식인데, 갑자기 연주를 끊는 것은 그 보초의 순직을 기억하라는 뜻일 것이다.


이 성당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바로 세계 최대 크기의 목조 제단이다. 이는 후기 고딕 양식을 대표하는 목조각가 바이트 슈토스(Veit Stoss)의 작품이다. 폴란드 최고의 예술품으로 평가받는데, 나치에게 약탈당했다가 되찾은 수난의 역사도 갖고 있다. 특히 성모 마리아의 승천을 주제로 한 제단화는 종교와 상관없이 예술적 깊이를 가진 걸작으로 일컬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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