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자, 이제 경주도 세계에 내놓을만한 관광명소가 됐어" 경주 보문관광단지가 완공된 1979년 4월, 박정희 대통령이 이 곳을 찾아 기념 식수를 한 뒤 한 참모에게 한 말이다. 보문단지는 박 대통령 지시로 탄생한 작품이다. 당시 경주는 신라 천년의 문화 유산을 간직했지만, 외국인 관광객이 즐길만한 시설은 턱없이 부족했다. 그는 경주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또 이를 세계에 자랑하고 싶어 했다. 이후 보문단지는 1980~1990년대 '신혼·수학여행 일번지'로 통하며 한국 관광의 심장으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해외여행이 보편화되면서 보문단지는 '그저 그런, 한물간 관광지'로 전락했다. 지난달 추석 연휴 때 보문단지를 둘러봤다. 적이 놀랐다. 조금 오버해 상전벽해(桑田碧海)였다. 보문호를 중심으로 한 수변공간은 친환경적이고 아주 세련된 공간으로 바뀌었다. 호숫가 특급호텔들은 눈부시게 으리으리해졌다. 한 차선 넓어진 경주 진입도로에서 보문단지로 향하는 길도 전보다 깔끔해졌다. 이 모두 2025 경주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의 개최의 효과요, 경북도와 경주시가 1년 넘게 공들여 다듬어 온 결과이리라.
지구촌 외교 큰잔치인 경주 APEC 정상회의가 유의미한 성과를 내고 그저께 막을 내렸다. 경주는 이 행사를 통해 더이상 한국의 작은 지방도시가 아닌, 세계가 주목하는 국제도시로 우뚝 섰다. 하지만 '글로벌 경주'를 위한 노정(路程)은 APEC 이후부터가 진정한 출발점이다. '경북도와 경주시의 시간'이 시작된 것. 이른바 '포스트 APEC'이다. 이를 제대로 실행하지 못한다면 '경주'라는 이름은 잠시 뉴스에 올랐다 기억에서 멀어지는 도시가 될 것이다. 이에 경북도가 최근 발빠르게 '포스트 APEC' 전략을 내놓은 건 고무적이다.
경북도는 APEC 정상회의를 발판으로 경주를 글로벌 역사·문화 도시로 업그레이드시키겠다는 비전을 내세우고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세계 경주 포럼'의 정례화다. 국제 포럼을 해마다 열어 세계 유산 도시간 네트워크를 쌓고, 역사·문화 분야 글로벌 이슈를 논의하는 플랫폼으로 발전시킬 계획이다. 이를 위해 보문단지 리노베이션에 박차를 가하고, 신라역사문화대공원을 짓는다. 보문단지와 경주시내 연결을 위한 교통 인프라(모노레일·자율주행차 등)도 확충할 방침이다.
해외 두 도시의 사례를 본다. 2017년 APEC 정상회의를 연 베트남 다낭은 APEC 이후 글로벌 컨벤션 도시로 급부상했다. 해변 관광과 국제회의를 결합한 전략이 제대로 먹혔다. 지금 다낭은 해마다 수백만명의 외국 관광객이 찾는 곳이 됐다. 경주와 같은 고도(古都)인 프랑스 아비뇽은 '페스티벌'을 통해 세계 공연예술의 성지로 자리매김했다. 이들 사례는 하나의 글로벌 행사가 도시의 먹거리 생태계까지 바꿀 수 있음을 잘 보여준다.
APEC 이후 미래 경주의 그림을 그려보자. △천년고도로서의 레거시(legacy) 전략 △마이스(MICE) 산업 △글로벌 축제 프로젝트라는 삼각축은 기본이다. 여기에 APEC 기간 세계의 주목을 받은 AI(인공지능)를 보태야 한다. 전통문화와 첨단기술의 융합 말이다. 이들 축이 잘 맞물려 돌아간다면 경주는 단순한 고도가 아니라 세계가 주목하는 '글로벌 역사·문화·첨단 도시'로 거듭날 수 있을 게다. 이철우 경북도지사는 "APEC 개최가 지역 발전의 디딤돌이 될 수 있도록 다각도로 준비 중"이라고 했다. 경북도와 경주시의 지속적인 실행력을 기대한다. 경주는 경북을 먹여 살리는 효자도시가 될 수 있다.
이창호 경북본사 본부장
이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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