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송 주왕산 전경<청송군 제공>
청송 주산지 전경<청송군 제공>
청송의 가을은 유난히 느리게, 그러나 깊게 찾아온다. 올해 초 대형산불로 검게 그을렸던 주왕산 일대에도 이제 단풍이 물들기 시작했다. 불길이 스쳐간 자리에 새싹이 돋고, 숲은 다시 사람들을 품을 준비를 마쳤다. 탄 냄새 대신 낙엽향이 돌아온 산자락에는 '자연의 회복력'이란 말이 절로 떠오른다.
산불로 인해 달기폭포 인근 장군봉~금은광이 코스와 월외코스는 여전히 출입이 통제돼 있지만, 주왕산 국립공원의 주요 탐방로는 정상 운영 중이다. 현재 개방된 코스는 가메봉 코스, 주왕산 계곡 코스, 주봉코스, 절골코스, 갓바위코스 등 다섯 곳이다.
이 가운데 절골분소∼가메봉사거리 구간(5.7km)은 멸종위기 야생식물의 서식지를 보호하기 위해 예약제로 운영된다. 숲의 깊이를 느끼며 걷는 이 길은 계곡 물소리와 낙엽 밟는 소리가 어우러져 가을의 정취를 더한다. 10월 중순부터 11월 초순까지는 단풍이 절정을 맞아, 붉은빛과 노란빛이 계곡을 덮는다. 바람 한 점에도 낙엽이 흩날리며 '자연의 시간'을 천천히 보여준다.
주왕산 계곡 코스는 초행자에게 가장 사랑받는 길이다. 용추폭포, 절구폭포, 용연폭포를 잇는 길을 따라 단풍이 절벽을 타고 내려오고, 물안개가 계곡 사이를 감싸며 은은한 빛을 낸다. 세 폭포를 모두 돌아보는 데 두 시간 남짓이면 충분해 가족 단위 탐방객도 무리 없이 걸을 수 있다. 중간중간 쉬어갈 수 있는 쉼터도 많아, 도시의 소음을 벗어나 자연의 숨결을 느끼기에 더없이 좋다.
주왕산에서 차로 10여 분 떨어진 주산지는 또 다른 가을의 무대다. 1721년에 축조된 인공 저수지로, 이른 아침 물안개와 붉은 단풍이 겹쳐지면 마치 한 폭의 수묵화 같다. 수면 위로 고개를 내민 왕버드나무들은 여전히 제자리를 지키며 세월의 흐름을 품고 있다.
주산지는 사계절 내내 아름답지만, 가을이야말로 가장 완벽한 순간이다. 햇살이 잔잔한 수면을 비추면 붉은 단풍과 푸른 하늘이 한데 어우러져 고요 속에서도 살아있는 듯한 풍경을 만든다. 사진 애호가들이 일출 전부터 삼각대를 세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른 새벽 안개 속에서 주산지를 바라보면, 붉은 산과 푸른 물, 회색의 안개가 한데 섞여 오묘한 색의 조화를 이룬다.
올 가을 청송의 주왕산과 주산지는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회복의 풍경'을 보여주는 장소다. 숲은 불에 탔지만 다시 잎을 틔웠고, 계곡은 여전히 흐른다. 사람들은 그 자연의 인내 속에서 마음의 쉼표를 찾는다.
주왕산 주차장에서 계곡길을 따라 천천히 걸으면 산의 숨결이 온몸에 스민다. 붉은 단풍잎 사이로 햇살이 스며들고, 산새의 노랫소리가 울려 퍼진다. 바쁜 일상에 지쳐 있던 이들도 이곳에서는 잠시 시간을 멈춘 듯한 평온함을 느낀다.
불탄 숲에도 다시 가을은 온다. 회복의 계절, 청송의 산과 물은 그 사실을 말없이 보여준다. 잠시 숨을 고르고 싶은 이들에게 청송은 여전히 가장 따뜻한 가을의 길을 내어준다.
정운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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