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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놀 유출이 불러온 ‘잃어버린 30년’…‘물의 도시’ 서사의 완성

2026-01-19 18:09

<1> 물의 시련과 선물

대구 달성군 구지면 일원에 14만5천㎡ 규모로 조성된 국가물산업클러스터 전경. 물 관련 핵심 인프라를 모두 갖춰 물산업 발전을 위한 궁극 인프라로 평가받는다. <국가물산업클러스터 입주기업협의회 제공>

대구 달성군 구지면 일원에 14만5천㎡ 규모로 조성된 국가물산업클러스터 전경. 물 관련 핵심 인프라를 모두 갖춰 물산업 발전을 위한 궁극 인프라로 평가받는다. <국가물산업클러스터 입주기업협의회 제공>

대구시민에게 '물(水)'은 단순 생활 인프라를 넘어 좀 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지난 30년간 물은 '갈등'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1991년 낙동강 페놀 유출 사건은 시민에게 잊을 수 없는 트라우마를 안겼다. 오랜 시간이 흐른 현재까지도 대구는 안전한 식수원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특히, '국내 제3의 도시'였던 대구의 성장엔진을 수십년간 꺼버린 야속한 존재다. 그런 대구가 역설적으로 물에서 다시 활로를 찾고 있다. 페놀 유출 사건이라는 역경을 거름삼아 물산업의 꽃을 활짝 피워내고 있다. 대구가 과거 갈등과 불안의 기억을 혁신으로 전환해 글로벌 물산업 도시로 도약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페놀 유출 후 대구의 '잃어버린 30년'


1991년 봄, 대구시민은 '물'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수돗물에서 올라온 낯선 냄새는 일상을 뒤흔들었고, 상수원 낙동강에 대한 믿음은 한순간에 무너졌다. 사건은 구미 두산전자 공장에서 페놀 원액이 대구의 식수원인 낙동강으로 유출되면서 시작됐다. 1991년 3월14일 페놀 원액 약 30t이 유출됐고, 4월22일에도 약 1.3t이 추가로 흘러들어 지역 식수 공급이 중단되는 사태로 번졌다. 페놀 유출 사건은 안전한 식수원에 대한 불안과 갈증으로 이어졌다. 시민단체들은 '수돗물 페놀 오염대책 시민단체 협의회'를 결성했고, 책임자 처벌을 촉구했다. 1차 원인제공자인 두산에게 조업정지 처분이 내려졌지만, 불안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낙동강을 수돗물의 원수로 사용하는 대구·경북·부산·경남권 전반에서 물에 대한 불안감이 확산했고, 이후 수질 개선과 상수원 보호는 지역 갈등과 정책 논쟁의 핵심이 됐다.


이 사건으로 인한 대구의 내상은 깊었다. 도시의 확장과 산업발전을 논의할 때마다 "물이 안전한가"라는 질문이 반복됐다. 1995년 대구의 미래 성장동력을 담고자 추진했던 위천국가산업단지 무산이 그 대표적 사례다. 페놀 유출 사건 불과 4년 후여서 공단 추진은 하류지역인 부산·경남권의 강한 반발에 부딪혔고, 결국 위천산단 조성은 무산됐다. 이후 2016년 대구국가산업단지(달성군 구지면)가 준공될 때까지 대구는 산업용지 부족으로 기업 유치에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페놀 유출 사건이 굴린 스노우볼(눈덩이)이 작금의 '대기업 하나 없는 도시'로 이어졌다는 게 경제계의 공통된 시각이다.


한 지역 경제계 인사는 "위천산단 조성이 무산되면서 대구는 산업 체질 개선 시기를 놓쳤다. 제조 기반 도시가 페놀 유출 사건으로 구조 전환의 파도를 제때 타지 못한 건 대구의 입장에서는 큰 불운"이라고 자조 섞인 말을 쏟아냈다.


◆맑은 물에 대한 갈증…국가물산업클러스터 유치


안전한 식수원에 대한 불안과 갈증은 자연스레 물산업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물에 크게 데인 대구시가 시민의 안전을 위해 안전한 수돗물 보급에 역량을 쏟으면서다. 실제로 이 사건 이후 대구의 상·하수도 인프라는 획기적으로 개선됐다. 현재 대구 수돗물 보급률은 99%에 육박하며, 세계 어느 국가와 비교해도 손색없는 뛰어난 인프라를 갖췄다. 대구에 씻을 수 없는 아픔을 안긴 낙동강 페놀 유출 사건이 아이러니하게도 물산업 부흥을 위한 토양을 갖추는 데는 일정 부분 공헌한 셈이다.


2013년 물산업 분야 궁극 인프라로 불리는 국가물산업클러스터 유치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시민에게 안전한 수돗물을 공급하려면 정수 기술이 필요하다. 사용한 하수가 강을 오염시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하수처리 기술이 발전해야 한다. 이러한 기술을 구현하려면 처리장치나 측정기 등 요소 기술도 함께 필요하다. 이 같은 시설들이 모두 집적한 종합 인프라가 국가물산업클러스터인데, 당시 맑은 물에 대한 시민의 열망과 관심이 최고조에 있던 대구로 올 수밖에 없는 흐름이었다는 게 업계의 설명이다. 이창 국가물산업클러스터 입주기업협의회 사무국장은 "간혹 다른 지역에 있는 사람들이 국가물산업클러스터 대구 입지에 대해 의아해한다"면서 "페놀 유출 사건 이후 대구 지역사회가 물에 투자한 노력이나 비용을 보면 전국 압도적인 1위일 것이다. 국가물산업클러스터 유치는 페놀 유출 사태와 그 이후 대구시민의 노력에 대한 국가 차원의 '보상' 성격도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반도체 2배 시장인데 '관심 밖'…왜?


2023년 기준 세계 물시장 규모는 1천458조 원 규모로 평가된다. 이는 세계 전력시장 규모와 비슷하고, '산업의 쌀'로 불리는 반도체 시장의 약 2배에 달하는 초거대 시장이다. 현재 미국과 중국, 일본이 전체 물 시장의 52%를 차지하는 가운데, 대구를 필두로 한 우리나라도 세계 10위권 진입을 목표로 달리고 있다.


초거대 블루오션 산업군임에도 물산업은 이상하리만큼 대구시민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다. 국가물산업클러스터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시민도 상당수 있을 정도다. 민선 8기부터 대구시가 ABB(인공지능·빅데이터·블록체인)와 미래모빌리티 등 이른바 5대 신산업 육성에 집중하면서 물산업이 우선순위에서 밀려난 탓이다. 민선 8기 첫해인 2022년 74억 원이었던 물산업 예산은 이듬해 61억 원, 2024년 41억 원, 지난해는 34억 원으로 3년 만에 반토막났다. 지원 부서도 '과'에서 '팀'으로 격하되는 등 노골적으로 물 등 친환경산업에 대한 배제 기조가 이어지고 있다.


다만, 작년 하반기부터 물산업은 다시 대구 주요 산업군에 포함되는 분위기다. 김정기 대구시장 권한대행은 취임 직후 국가물산업클러스터를 찾아 현장 관계자들의 애로사항을 청취했다. 올초 신년 업무계획 보고회에서도 물산업 진흥이 주요 안건으로 다뤄졌다. 올해 대구 경제 정책 주요 화두 중 하나가 ODA(공적개발원조) 확대인 만큼, ODA의 핵심인 물산업 관련 지역기업들의 수출 전망도 밝다는 분석이다.


김정섭 대구시 환경수자원국장은 "전임 시장 시절에 신산업 위주의 정책을 펴다 보니 물산업이 침체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많았지만, 실질적으로 관심이 줄어든 것은 아니다"며 "현재 대구는 노후화된 상하수도관 교체 등 관련 공공 사업 규모가 늘고 있다. 이런 공공 시장에서 지역 업체 물품 구매를 늘리고 전시회를 여는 등 지역 물산업 진흥을 위해 다각적인 정책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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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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