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영 수필가
냉이를 물에 담가 놓는다. 한참 뒤 뿌리를 비벼 씻으면 마른 잎과 흙이 깨끗이 떨어진다. 다듬어 전을 부치고, 삶아 된장에 조물조물 무쳐 내면, 밥상 위에는 어느새 봄이 가득하다. 들판에는 먹거리가 지천이라지만 자세히 보지 않으면 이름 모를 풀일 뿐이다.
햇살이 고운 2월의 어느 날 오후였다. 운동 삼아 다니던 길이 농로로 접어들 때, 갓길에 세워진 빨간 승용차와 그 옆에 도시 냄새가 나는 여인이 서 있었다. 그녀는 다가오더니 어디에 가야 냉이가 있는지 물었다. 시골 인심이 좋다지만 무작정 남의 밭에 발을 들이기는 부담스러웠으리라. 하지만 그녀의 차림새는 냉이를 캐기에는 너무도 말쑥했다. 나는 손을 들어 저기 가보라고 대충 일러주었다. 냉이에 대한 간절함이 보이지 않아서일까. 왠지 심술이 조금 났다.
걷기 시작한 지 10분쯤 지났을까. 좀 전의 빨간 차가 옆에 서더니, 그 밭에는 냉이가 없다고 했다. 냉이를 아시느냐고 물었더니 안다고 했다. 여인의 신발을 보니, 흙도 검불도 묻어있지 않았다. "차에서 내려 허리를 굽혀보세요. 마른 풀 속에 납작 엎드려 있거든요."
겨울의 냉이는 영하의 기온을 견디며 뿌리만 키운다. 자칫하면 동태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낮과 밤의 기온 차가 널뛰기를 하는 2월 초, 혹독한 추위를 견디는 냉이는 향도 진하고 달고 맛있다. 그 맛은 추위를 견뎌낸 생명이 뿜어내는 향이다.
오래전, 남편은 방학 내내 게임만 하는 아이들을 꼬드겨 길을 나섰다. 버너와 냄비를 챙기고 삽과 괭이까지 실어 도착한 곳은 산속의 낡은 재실이었다. 재실 개축 답사를 왔던 남편의 눈에 마당 가득한 냉이가 들어왔던 모양이었다. 언 땅에도 냉이가 납작 엎드려 있었다. 남편은 괭이질하고 아이들은 삽으로 냉이를 품은 흙을 떠올렸다. 아이들은 깊이 뻗은 뿌리를 뽑아 올리는 재미에 신바람이 났다. 땀을 흠뻑 흘린 뒤 끓여 먹는 그 날의 라면은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운동하고 돌아오는 길에 옆집 밭에 들렀다. 바싹거리는 검불을 걷어내니 냉이가 바짝 엎드려 있었다. 쪼그리고 들여다보면 온 천지가 냉이인 것을. 그 빨간 차 여인은 냉이를 만났을까. 저녁 찬거리로 냉이 한 줌을 캤다.
스치고 지나가면 만날 수 없는 것들이 이뿐이겠는가. 허리 숙여 흙냄새도 맡고, 마른 풀을 들추는 수고를 해야 땅은 숨은 것들을 내준다. 밥상에 오른 향긋한 봄 내음은, 허리 굽혀 자세히 들여다본 덕분에 얻은 자연의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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