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야마을 전경. 멀리 국사봉(뒷산)이 보인다. <박광제 사진작가 제공>
삼한시대부터 존재한 경북 김천시 아포읍 국사리엔 '아야(阿也)'마을이 있다. 별칭 '애기'라고도 불리며, 현지 주민들은 아야보다 애기라는 예쁜 지명을 즐겨 쓴다.
우리말 '아야!'는 사람들이 갑자기 아픔을 느낄 때 얼굴을 찡그리며 반사적으로 내뱉는 감탄사이며, 어른이 아이를 부르거나, 친구들이 서로를 부르는 정겨운 소리이기도 하다. 별칭 '애기'에서는 갓 태어난 '아기'가 연상된다. 형세나 풍수지리, 특산물 등에 의존하는, 정형화된 과정을 거치지 않고 명명된 듯 싶은 지명에서는 활발함과 자유로움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아야는 한문으로 언덕 아(阿)에 어조사야(也)를 쓰고 있다. 아포읍의 주산인 국사봉(480m) 아래 넓은 개활지에 위치한 마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지명이라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사방이 넓은 들판인 마을을 '언덕 아래 작은 마을'이라는 취지로 작명했다는 지적이다.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은 "지명으로 보면 언덕도 없는 마을이 '언덕 아래 마을'이 됐다. 여기에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어조사야(也)까지 끌어들여 근원도 알 수 없는 지명을 만들어 버렸다"며 "일제강점기인 1914년, 전국적인 행정체계 개편과정에서 많은 마을을 개명시켰다. 이때 넓고 기름진 들을 뜻하는 버금아(亞)에 들야(野)자를 쓰던 아야마을이 아야(阿也)마을로 개명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론했다.
아야마을로 가는 도로변에 서 있는 아야마을 표지석 <박광제 사진작가 제공>
시골마을로는 대규모인 100여가구가 모여 사는 아야마을은 영월 신씨 집성촌(30여가구)이다. 김해 김씨도 큰 가문을 이루고 있다. 이 마을 원로인 신중근(78)씨에 따르면 그의 11대 조부는 포항(영일) 기계면에서 구미(선산) 도계면으로 이주했고, 임진왜란이 이전에 다시 아들을 등에 업고 김천 쪽으로 이동하다가 멀리 보이는 국사봉 아래 넓은 땅이 있고 사람이 살고 있음을 직감, 산 아래 독골로 들어왔다. 입향조이다. 그후 임진왜란이 발발한 데다, 큰 수해까지 덮치자 무인지경의 현재 마을 위치로 이주하고, 하나뿐인 아들을 인근의 부잣집에 장가들게 하는 등 정착 기반을 다졌다.
신 씨에 따르면 그의 10대 조부의 이름이 득남(得男)이었다. 여기에는 '자식을 많이 낳아 번성하라'는 신씨 11대 조부의 간절한 염원이 담겨 있다. 실제로 신씨 10대 조부는 8남매를 두고, 자식들과 함께 가문의 부흥을 이끌었다고 한다. 나아가 '들이 넓어 살기에 좋은 마을'이라 하여 지명을 '아야(亞野)'로 명명하는 등 마을을 개척했다고 한다.
아야마을 내력을 얘기하고 있는 신중근씨. <박광제 사진작가 제공>
이 같은 과정을 통해 아야마을은 형성됐지만, 마을 별칭이 '애기'인 까닭은 여전히 의문이다. 신 씨는 "어릴 적부터 밖에서는 우리 마을을 '아야'라고 했고, 마을 사람들은 '애기'라고 했다"며 "(애기라는 별칭의 배경을) 아마 할아버지가 계셨어도 시원한 대답을 못 들었을 것"이라고 했다. 이어 "그냥 자연스럽게 정착됐을 뿐이지, 어린이를 지칭한 '애기'도, 한자로 쓸 수 있는 '애기'도 아니다"고 설명했다. 송 국장은 "별칭 '애기'는 '아야'가 오랜 시간 변음과정을 거쳐 낳은 결과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한편 이 마을은 오래 전부터 주민 화합과 풍년을 기원하는 마을 공동제사(동제)를 지냈고, 이 동제를 '애기동제'라고 했다. 여기에서 어원을 찾기도 한다.
신씨가 어렸을 적엔 아야마을은 면사무소가 있는 아포면(당시) 소재지였다. 그러나 1916년 경부선 철도 아포역 개설과 함께 형성된 '역전마을'이 차츰차츰 성장함에 따라 1958년, 면사무소가 옮겨가면서 아야마을의 면소재지 시대는 막을 내린다.
박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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