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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 시간을 품고 미래를 잇다⑥] 다시 태어나는 상주읍성 북문

2026-06-02 06:00

아스팔트 밑 침묵 깨고…500년 요새, 다시 선다

상주시는 서성동 81-2번지 일원에 상주읍성 북문을 복원하고 있다. 상주읍성은 경상도지리지에 기록된 경상도 내 29개 읍성 중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거대한 규모를 자랑했다. 사진은 상주읍성 북문 복원 조감도. <상주시 제공>

상주시는 서성동 81-2번지 일원에 상주읍성 북문을 복원하고 있다. 상주읍성은 '경상도지리지'에 기록된 경상도 내 29개 읍성 중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거대한 규모를 자랑했다. 사진은 상주읍성 북문 복원 조감도. <상주시 제공>

방어시설이자 행정·경제의 중심 상주읍성

1912년 일제 '읍성 철거령'에 무참히 헐려

서성동 일대 발굴조사서 북문터 모습 드러나

올해 복원공사 착공…내년엔 북문역사공원

구도심 역사문화공원化로 정체성 회복 기대

2024년 8월, 상주 서성동 81-2번지 일원의 굳게 닫혀있던 차가운 아스팔트 아래에서 역사의 거대한 파편들이 쏟아져 나왔다. 수많은 자동차가 오가던 도로 밑 흙더미 속에서 1912년 일제에 의해 처참하게 헐렸던 상주읍성의 '북문터(北門址)'가 그 실체를 세상에 드러낸 것이다. 그동안 고지도와 문헌, 낡은 흑백 사진으로만 추정해 왔던 북문의 정확한 위치와 기저부 시설이 최초로 확인되는 경이로운 순간이었다. 이 역사적인 발견은 단순히 땅속에 묻힌 돌무더기를 찾아낸 것을 넘어, 100년 넘게 짓밟혀 온 '대읍(大邑)' 상주의 자존심과 정체성이 완벽한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음을 의미한다.


◆땀과 눈물로 쌓아 올린 500년 요새


북문 발굴을 기점으로 다시 살아나고 있는 상주읍성의 뿌리는 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 충숙왕 원년, '경상도'라는 명칭이 등장할 때 '상(尙)'은 신라 9주 중 하나였던 상주를 가리킬 만큼 상주는 경주와 함께 영남 지방을 지탱하는 거대한 중심 도시였다. 고려의 문인 이제현이 "경주가 가장 크고, 상주가 그 다음"이라 극찬할 정도로 상주는 영남 11개 지역을 포괄하는 계수관(界首官)으로서 막강한 위상을 떨쳤다. 이러한 대읍의 지위는 조선시대에도 이어져, 태종 8년에는 한양에서 내려오는 길목이라는 지리적 중요성 덕분에 경상감영이 경주에서 상주로 이전해 오기도 했다.


하지만 눈부신 번영의 이면에는 외적의 잦은 침탈이라는 아픔이 있었다. 1380년, 왜구가 상주에 침입해 무려 7일 동안 머물며 관아와 민가를 모조리 불태우는 끔찍한 참상이 벌어졌다. 잿더미가 된 고향 땅에서 상주인들은 다시는 외적에게 짓밟히지 않겠다는 처절한 결의를 다졌다. 권근의 '풍영루기(風詠樓記)'에 따르면, 이듬해인 1381년 반자(半刺) 전리(田理)의 주도로 백성들이 직접 피땀 흘려 돌을 나르기 시작했고, 1385년 마침내 웅장한 상주읍성을 완성해 냈다. '경상도지리지'에 기록된 경상도 내 29개 읍성 중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던 상주읍성은 방어 시설을 넘어 백성들의 행정, 경제, 문화의 구심점이자 희로애락이 응집된 심장부였다.


서울의 골동품상인이 발견한 엽서에 남겨진 1910년쯤 상주읍성 북문의 모습. <상주시 제공>

서울의 골동품상인이 발견한 엽서에 남겨진 1910년쯤 상주읍성 북문의 모습. <상주시 제공>

◆100년의 망각…日서 날아온 7장의 기적


500여 년을 굳건히 버텨온 상주의 심장은 1912년 일제의 '읍성 철거령'으로 무참히 도려내졌다. 일제는 표면적으로 '도시화 계획'을 내세웠으나, 실상은 일본인들의 상업 활동 편의를 극대화하고 상가 요지를 독차지하기 위한 탐욕스러운 폭거였다. 1910년에서 1918년 사이 측량된 지적도를 보면 읍성이 철거된 노른자위 땅의 소유주가 대부분 일본인으로 기록되어 그들의 검은 속내를 명백히 증명하고 있다. 견고했던 성벽이 부서지고 연못이 메워진 자리에 덧없이 미나리꽝과 왕골밭이 들어서고 일본인 가옥이 채워졌다. 1929년 증보된 '상산지'에서 "예전의 성이나 연못이 있던 곳을 이제 다시 기억할 수 없다"고 한탄했듯, 상주인들의 정체성은 철저히 말살당했다.


영원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뻔했던 상주읍성이 기적처럼 원형 복원의 열쇠를 쥐게 된 것은 100년의 기다림이 빚어낸 운명적 사건 덕분이었다. 2014년 일본 도쿄 고서점가의 문헌자료 교환회에서 서울의 한 골동품상이 1910년대 상주읍성의 모습이 담긴 우편엽서 7장을 극적으로 발견했다. 2015년 상주박물관이 이 귀중한 엽서를 전격 입수했고, 이후 2016년부터 2020년까지 봇물 터지듯 관련 사진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이 생생한 사진들은 '가장 완벽하고 구체적인 원형 복원'의 강력한 무기이자 설계도가 됐다.


서성동 81-2번지 일원에서 발굴된 상주읍성의 체성부, 해자(垓子), 북문지, 등성시설. 2단으로 견고하게 쌓아 올린 축조 방식이 그대로 남아있다. <상주시 제공>

서성동 81-2번지 일원에서 발굴된 상주읍성의 체성부, 해자(垓子), 북문지, 등성시설. 2단으로 견고하게 쌓아 올린 축조 방식이 그대로 남아있다. <상주시 제공>

◆완벽한 고증의 마침표를 찍다


풍부한 사진 자료를 땅 위에 구현하기 위한 상주시의 노력은 2024년 8월, 서성동 81-2번지 일원의 발굴조사에서 커다란 성과를 얻었다. 조사 결과, 그동안 도로 밑에 숨죽이고 있던 상주읍성의 체성부, 해자(垓子), 북문지, 그리고 성문 누각으로 올라가는 등성시설까지 완벽한 세트로 그 모습이 확인된 것이다.


특히 전문가들을 흥분시킨 것은 상주 최초로 확인된 북문지(北門址)의 정교한 기저부 시설이었다. 발굴팀은 성문을 통과하는 문구부를 조성하기 위해 약 300cm의 너비를 확보하고, 서쪽에 방형의 석재를 치밀하게 배치하여 체성부와 문구부의 경계를 엄격히 구획한 흔적을 찾아냈다. 방형 석재 안쪽으로는 길이 35cm, 두께 약 30cm 내외의 할석(깬돌)을 남북 방향으로 가로눕혀(횡평적) 2단으로 견고하게 쌓아 올린 축조 방식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북문터 주변의 연쇄적인 발굴 성과도 복원의 정당성을 강력히 뒷받침하고 있다. 2024년 1월 인봉동 97번지 유적 발굴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도로 유구와 함께 상주읍성의 성벽·해자·배수로가 대거 확인됐다. 이곳의 성벽은 'ㄴ'자형으로 땅을 파고 10~20cm의 정지층을 마련한 뒤, 지대석을 평평하게 깔고 면석을 들여쌓기(퇴물림) 하는 방식을 취했다. 뒷부분은 흙을 쌓아 올려 성벽을 지탱하는 전통적인 내탁방식이 확인돼 조선 전기 읍성의 전형적인 축조 기법을 명백히 증명해 주었다.


상주시는 북문을 우선 복원해 2027년 그 인근을 북문역사공원으로 조성한다는 복안이다. 북문 복원이 끝나면 동문과 잇고 상주향청 등과 묶어 구도심을 역사문화공원으로 재탄생시킨다는 계획이다.

상주시는 북문을 우선 복원해 2027년 그 인근을 북문역사공원으로 조성한다는 복안이다. 북문 복원이 끝나면 동문과 잇고 상주향청 등과 묶어 구도심을 역사문화공원으로 재탄생시킨다는 계획이다.

◆구도심을 역사문화공원으로


북문의 실체가 완벽히 확인됨에 따라, 2021년부터 총 196억 원을 투입해 준비해 온 상주읍성 북문 복원 사업은 속도를 내고 있다. 상주시는 2022년 기본계획 수립 이후 3차례에 걸친 발굴조사와 20회 이상의 깐깐한 전문가 자문을 거치며 실시설계의 완성도를 끌어올렸다.


2026년 6월까지 부지 내 잔여 건물 철거를 마무리하고 동시에 북문 복원공사의 첫 삽을 뜬다. 이미 철거 공사가 진행되면서 왕산 정면을 답답하게 가로막고 있던 건물들이 사라져 왕산역사공원의 탁 트인 경관이 확보되는 긍정적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상주시의 원대한 밑그림은 단순히 옛 건물을 세우는 데 그치지 않는다. 왕산을 기점으로 북문을 우선 복원, 2027년에는 이를 '북문역사공원'으로 조성해 시민에게 돌려줄 계획이다. 북문 복원이 완성되면 동문까지 성벽을 이을 계획이다. 또 옛 상주경찰서 자리에 원래 있던 상산관을 되돌려 놓으며, 현존하는 상주향청과 복룡동 유적·주조장 등을 하나로 묶어 상주 구도심을 역사문화공원으로 탈바꿈시킨다는 청사진을 준비하고 있다.


상주읍성은 방어 시설을 넘어 백성들의 행정, 경제, 문화의 구심점이었다. 상주읍성 유적 정비·복원은 사회·문화적으로도 큰 가치를 부여하는 사업이다.

상주읍성은 방어 시설을 넘어 백성들의 행정, 경제, 문화의 구심점이었다. 상주읍성 유적 정비·복원은 사회·문화적으로도 큰 가치를 부여하는 사업이다.

주민들의 기대감도 크다. 인근주민인 최성혜(46)씨는 "구도심에 활력을 불어넣고 상주만의 고풍스러운 이미지가 추가되는 것"이라며 "관광객이 찾아 경제활성화에 도움을 주지 않을까 기대된다"고 말했다.


상주시 문화예술과 김진형 팀장은 "상주읍성 유적의 정비와 복원은 단순히 옛 성곽의 형태를 재현하는 물리적 복원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며 "상주가 지닌 역사성과 정체성, 그리고 지역민들의 삶과 기억이 함께 살아 숨 쉬는 사회·문화적 복원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상주읍성이 시민들에게 지역의 역사에 대한 자긍심과 공동체의 정체성을 일깨우는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자리매김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과거 상주 백성들이 피와 땀으로 쌓아 올렸던 500년의 요새. 일본의 탐욕에 의해 무참히 부서진 지 100여 년 만에, 아스팔트를 뚫고 나온 300cm 너비의 북문터가 길고 긴 침묵을 깼다. 견고하게 쌓아 올린 2단의 할석 위에 웅장한 북문이 다시 우뚝 서는 날, 빼앗겼던 대읍(大邑) 상주의 빛나는 영광과 잃어버린 시민들의 자존심도 마침내 힘차게 다시 깨어날 것이다.


글=박준상기자 junsang@yeongnam.com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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