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성 대곡사 전경. <의성군 제공>
경북 의성군 다인면 비봉산 기슭에 자리한 대곡사. 계곡을 따라 유유자적 흐르는 물소리와 범종루 아래를 스쳐 지나가는 바람을 지켜보는 수백년 된 종루 기둥이 무심한 듯 외지에서 찾아온 객을 반겨주는 탓일까. 이른 아침, 비봉산 자락을 감싸고 있던 안개가 천천히 걷히는 산길을 따라 대곡사 일주문을 들어서면 속세의 시간과는 다른 묘한 기운을 느낀다.
대곡사는 고려 공민왕 17년(1368년) 인도 승려인 지공 선사와 나옹 화상의 가르침을 이은 이들이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조선시대 숭유억불 정책 속에서도 수행의 맥을 이어 갔고, 한 때는 암자만 아홉개를 거느릴 정도로 번성했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전각 대부분이 소실된 후인 1605년 탄우 스님이 중창하면서 다시 일어섰다. 이처럼 현재 대곡사에 남아 있는 전각과 유물들은 단순한 의미에서 옛 건축물이 아니다. 전쟁과 화재 등 시대의 격변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려 했던 사람들의 의지임과 동시에 지역 공동체가 이어온 기억의 흔적인 셈이다.
◆종소리로 세상을 깨우는 대곡사 범종루
대곡사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범종루는 단순히 종을 걸어두는 건물의 기능만 하는 것이 아니다. 새벽에는 중생을 깨우는 종소리가 울려 퍼지고, 재난과 질병 속에서는 공동체의 안녕을 기원하는 마음을 담는다. 이처럼 건축물임과 동시에 신앙의 언어이기도 한 범종루는 대웅전 보다 한 단 낮은 곳에 서 있다. 보물로 지정(2021년 3월 25일)된 범종루는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중층 누각이다. 조선 후기 다포계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 건축물로, 외부로 돌출된 쇠서(牛舌·건물 외부로 돌출된 서까래 끝을 소의 혀처럼 다듬은 모양) 윗부분에는 조선 후기 특유의 섬세한 조각 수법을 드러낸 연꽃무늬가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특히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공포를 하나씩 배치하면서, 가운데 칸에는 공포를 두지 않은 독특한 구성은 다른 누각에서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기법이다. 이러한 조형 수법은 대곡사 대웅전의 조각 기법을 계승한 것으로 평가됨에 따라, 대웅전보다 늦은 시기에 조성된 조선 후기 건축물로 추정된다.
이런 누각 아래를 지나가면 종소리를 통해 삶의 무게를 내려놓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힘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의성 대곡사 전경. <의성군 제공>
◆임진왜란 이후 다시 세운 희망, 대웅전
범종루에 앞서 보물로 지정(2014년 7월 3일)된 대웅전은 임진왜란 이후 중창되면서 조선 후기 불교 건축의 특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다포계 팔작기와 건축물로, 장대석 기단 위에 배흘림 원주를 세우고 기둥 위와 사이마다 공포를 촘촘히 배치해 웅장하면서도 정교한 조형미를 갖추고 있다. 전란 이후 다시 세워진 대웅전은 단순한 예배 공간을 넘어 공동체의 안식처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게 삶의 터전을 잃고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던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 서로를 위로하고 평안을 기원하며 다시 일어설 힘을 얻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병든 가족의 쾌유를 빌었고, 누군가는 전쟁 없는 세상을 기원하면서 대웅전의 기둥과 서까래에는 이름 없는 이들의 소망이 켜켜이 쌓여 있는 듯 하다.
◆돌로 쌓은 수행의 시간
대웅전 앞에는 경북도 문화유산자료인 의성 대곡사 다층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흔히 볼 수 있는 화강암이 아니라, 점판암을 사용해 만든 '청석탑'이다. 짙은 푸른빛을 띠는 점판암을 층층이 쌓아 올린 독특한 모습이 이채롭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청석탑 가운데, 비교적 이른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평가된다. 학계에서는 청석탑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해인사 원당암 다층석탑과 비슷한 시기이거나, 그보다 조금 늦은 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따라서 대곡사 다층석탑은 단순한 사찰 장식물이 아니라 당시 석탑 양식의 변화와 지역 불교문화의 흐름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임을 알 수 있다. 풍화로 인해 일부 훼손된 흔적이 있지만, 이마저도 오랜 시간 신앙과 수행의 공간을 지켜온 산사의 역사를 고스란히 전해주는 듯 하다.
◆적조암 구포루, 마지막 암자가 품은 이야기
대곡사에는 한때 아홉 개의 암자가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지금은 적조암만이 남아 그 명맥을 잇고 있다. '봉황이 머무는 누각'이란 뜻을 지닌 적조암 구포루는 이름처럼 수행자들의 쉼터이자 사유의 공간이다. 경북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된 독특한 건축물로, 오래된 마루에 앉아 산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으면, 시간마저 천천히 흐르는 듯 하다. 1847년 인법당으로 건립된 후, 고승들의 진영을 모시는 공간으로도 활용됐다. 경사진 지형을 활용해 마루를 높게 구성하는 등 다른 지역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구조적 특징을 갖고 있다.
◆산사에 남은 사람들의 기억, 그리고 오늘의 울림
문화유산은 결국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살아남는다. 대곡사와 범종루, 그리고 적조암 구포루 또한 과거의 유물에 머물지 않는다. 범종루에 울려 퍼진 종소리와 대웅전에 모인 기도, 구포루 마루에 스민 수행자의 숨결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삶의 속도를 되묻는 듯 하다. 이번 주말, 잠시 걸음을 늦춰 비봉산 산길을 따라 대곡사를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서두르지 않는 산사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잊고 지냈던 평온과 위로는 물론, 다음 세대에게 남겨야 할 진정한 유산의 의미를 알기 위해 말이다.
그렇듯 의성군 문화해설사 박성숙씨는 "대곡사는 화려하지 않지만 오래된 기도가 차곡차곡 쌓인 공간"이라면서 "가족과 함께 찾는 방문객으로부터 '아이들에게 역사책보다 더 생생한 교육'이라는 말과 함께, '건물 하나하나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다'는 소감을 자주 듣는다"고 말했다.
마창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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