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 속 남이장군이 칼로 벤 그 절벽…수만년 물길이 빚은 신비
반변천과 동천이 빚어낸 남이포 절경
두 하천 만나는 '하천쟁탈' 지리현상
조선 백성들 상상력 더해 전설로 탄생
고추홍보전시관·효공원과 연계하고
분재수목원 조성하고 경관개선 추진
영양 선바위관광지 옆에 있는 남이정은 동천과 반변천 사이 자금병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벼랑과 기슭에 세워진 남이정과 흐르는 강물은 절경을 보여준다.
남이장군의 설화가 전해지는 경북 영양 선바위.
"운룡지(雲龍池)의 지룡(池龍)의 아들인 아룡(阿龍)과 자룡(子龍) 형제가 있었는데 역모를 꾀해 무리를 모아 반란을 일으키자 조정에서 남이장군(南怡將軍)에게 토벌할 것을 명하니 남이장군이 이곳까지 내려와 아룡과 자룡을 물리치고 도적의 무리가 다시 일어날 것 같아 큰 칼로 산맥을 잘라 물길을 돌렸다 하는데 그 마지막 흔적이 선바위라 한다."
선바위 앞 관광안내판에 소개된 선바위와 남이포에 얽힌 전설이다. 반변천과 동천(청계천)이 합류하는 곳을 남이포라 부르는데, 선바위 북쪽 건너편에는 두 하천이 깎은 벼랑이 예각을 이루며 서 있다. 붉은 비단 같은 병풍바위라는 뜻으로 자금병(紫錦屛)이라 불리는 벼랑과 그 아래 기슭에 세워진 남이정, 그리고 도도히 흐르는 강물이 절경을 이룬다.
영양 선바위관광지 옆에 있는 남이정은 동천과 반변천 사이 자금병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선바위와 남이포 같은 기이한 풍경에 감탄하면서 경외감을 느꼈을 터이고, 또 어떻게 저런 특이한 지형이 생겨났는지에 대한 호기심도 생겼을 것이다. 성리학적 세계관 속에 살던 사대부들은 시를 짓거나 그림을 그리면서 교훈과 위안을 얻는 것으로 해결했지만, 일반 서민들은 그럴듯한 이야기를 만들어 두려움과 답답함을 풀고, 소원을 이뤄달라고 그 대상에 빌기도 했다. 이렇게 탄생한 전설은 그것을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에 유대감과 안정감을 주었다.
선바위와 남이포 전설에서 '남이장군이 큰 칼로 산맥을 잘라 물길을 돌렸다'는 이야기는 자금병이 마치 칼로 자른 듯한 모습이기 때문에 생겨났을 것이다. 또한 깎아지른 절벽이 남북으로 마주보고 서있는 모양이 산줄기의 가운데가 뚝 잘려나간 것처럼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산맥을 잘라 물길을 돌렸다'는 이 이야기는 과학적으로도 타당하다. '남이장군의 칼'을 '두 하천의 물'로 고친다면 말이다.
원래 자금병 뒷산(자양산 혹은 무이산)과 선바위 뒤 부용봉은 이어져 있었다. 그 산줄기의 동쪽은 반변천 물이 계속 깎고, 서쪽은 동천 물이 계속 깎아 결국 두 하천의 물길이 만나게 됐다. 그곳이 바로 우리가 남이포라 부르는 곳이다.
그 이전에 동천은 선바위 부근에서 지금의 신사2리를 향해 서쪽으로 흐르다 다시 방향을 꺾어 지금의 서치마을로 흘러와 반변천에 합류했다. 남이포가 뚫리자 동천의 물은 고도가 낮은 반변천으로 바로 흘러들어갔으며 반변천 물길은 침식작용으로 더욱 낮아져 동천의 옛 물길로는 더 이상 물이 흐를 수 없게 됐다. 이러한 과정에서 남이포는 선바위·애기선바위·자금병 등을 갖춘 특별한 경승지가 됐다. 동천의 옛 물길이 흐르던 곳에는 훗날 사람들이 들어와 밭을 갈아 씨를 뿌리고 집을 지어 마을을 이뤘다.
경북 영양 선바위관광지에 있는 분재야생화테마파크.
지리학에서는 두 하천 간에 생기는 이런 현상을 '하천쟁탈(Stream capture, Stream Piracy)'라고 부른다. 그러고 보면 남이장군 전설에 나오는 '운룡지' 위치를 보면 이야기가 그럴 듯해진다. 운룡지는 신사2리 위쪽 대천리에 있는 못이어서 동천과 가까이 이어져 있었으니 두 용이 반란을 일으킬 만했을 것 같다. 물론 하천쟁탈이 일어날 때 운룡지가 생기지도 않았겠지만.
그러니 전설이라고 허무맹랑한 것만은 아니다. 전설은 한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니라 여러 사람에게 전승되면서 그럴듯한 부분이 계속 첨가된다. 선바위 남이장군 전설도 지형에 대한 세밀한 관찰과 논리적 추론이 계속 덧붙여지며 다듬어져 왔을 것이다. 그 덕분에 하천쟁탈은 수만~수십만 년에 걸쳐 벌어지는 현상인데, 100년도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과학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도 비슷한 결론에 도달한 셈이다.
상상력을 동원해 채워 넣어야 할 부분에는 민중들의 바람이 반영된다. 민간에서는 대체로 남이장군이 간신의 무고로 젊은 나이에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영웅으로 받아들여졌으므로, 그에 대한 유대감이 당시 영양 사람들에게도 의미 있게 다가왔을 것이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남이장군이 살아생전에 영양 땅을 밟을 일은 없었던 것 같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아무런 인연이 없었던 영양과 남이장군이 연결된 이유는 그의 이름 덕분일 가능성이 있다.
남이장군 등산로에 있는 소원봉에서 본 선바위관광지. 반변천변에 조성된 선바위관광지에는 분재수석야생화전시관, 분재야생화테마파크, 영양고추홍보전시관, 효공원 등이 조성돼 있다.
서석지를 건립한 석문 정영방의 손자인 수와 정요성(1650~1724)의 '임천산수기'에는 선바위 부근을 설명하는 부분에 이런 구절이 있다.
"두 돌산이 마주보고 서서 문을 이룬다. 거리는 130무(117m)이다. 마치 하나의 산 가운데가 터져서 이뤄진 것 같다. 그래서 백성들은 남애라고 한다(兩石山相値爲門。相去百三十武。如一山中坼而成。故俗云南厓)."
선바위와 부용봉의 돌벽을 남애 즉 남쪽벼랑이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남애'의 발음이 점점 '남이'로 변하면서 남이장군 전설이 탄생한 것일 수도 있다. 반대로 백성들 사이에는 이미 남이장군 전설이 널리 퍼져 있었으나 아직 남이장군의 복권(1818)이 이뤄지기 전이니 에둘러 얘기한 것일 수도 있겠다.
백성들 사이에서 구전돼온 전설에 대한 정확한 사실은 알 수 없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전설을 바탕으로 더욱 풍성한 이야기를 풀어볼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아룡'과 '자룡'을 처단하는 내용은 남이가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것을 비유한 것으로 읽을 수 있지만, '아룡'이라는 이름은 우리말로 옮기면 '용이'처럼 아이 이름을 친근하게 부르는 것으로 읽히므로 젊은 나이에 죽은 남이 자신의 이미지가 덧씌워진 것으로 볼 수도 있겠고, '자룡'이라는 이름은 남이의 역모를 고변해 죽음에 이르게 만든 유'자광'의 이름을 연상시킨다고 할 수도 있겠다. 또 왕명을 받고 내려온 남이장군에게 굳이 '이곳까지 내려와'라는 표현을 쓴 부분은 영양이 오지라는 영양 사람들의 안타까움이 은연중에 드러난 것으로 읽을 수도 있겠다.
선바위와 남이포에서 남이장군 전설을 매개로 백성들의 삶을 이리저리 상상해보고 난 뒤, 인근에 있는 산촌생활박물관으로 가서 전시물을 차근차근 살펴보면 더 깊은 이해와 감동을 얻을 수 있다. 또 조선 3대 민간정원으로 꼽히는 서석지를 둘러보며 자연 속에서 마음과 학문을 닦았던 옛 선비들의 정신세계를 더듬어 본다면 더욱 풍성한 시간이 될 것이다.
경북 영양 선바위관광지에 있는 영양고추홍보전시관을 찾은 관광객이 세계 각국의 고추를 살펴보고 있다.
영양 자연8경을 소개할 때는 보통 영양의 진산인 일월산 일출을 첫 번째로 얘기하고 그 다음으로 선바위와 남이포를 얘기한다. 그러나 풍광과 관광자원의 다채로움으로 볼 때, 또한 영양을 찾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관문관광지라는 점에서 선바위와 남이포가 첫째 자리에 가더라도 지나치지 않아 보인다.
반변천변에 조성된 선바위관광지에는 분재수석야생화전시관, 분재야생화테마파크, 영양고추홍보전시관, 효공원 등이 조성돼 있다. 석문교를 지나 남이장군 놀이터, 소원봉 전망대, 애기선바위 등으로 이어지는 둘레길도 걸어볼 수 있다. 앞으로 영양군은 민선9기 선바위 소규모 관광단지 조성 추진계획을 연계해, 경관개선·분재수목원 조성·분재수석전시관 리모델링 등 선바위관광지를 영양의 대표 관광지로 발전시킬 계획이다.
백 년쯤 뒤에는 이런 '전설'같은 이야기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수 있을까?
'옛날에 저녁 무렵 어린 손주를 데리고 선바위관광지를 산책하던 할머니가 선바위와 남이포에 얽힌 남이장군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더랬지. 초롱초롱한 눈으로 얘기를 듣던 손주는 고개 들어 노을 비낀 하늘을 올려다보며 두 마리 용과 싸우는 슈퍼히어로를 상상하곤 했더랬지. 아, 그런데 나중에 그 아이가 자라서…….'
글=김광재 영남일보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공동기획 - 영양군청>
이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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