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기 경북대 명예교수
미국 캘리포니아대 버클리 분교의 세계적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 교수는 책 '코끼리를 생각하지 마라'에서 생각의 틀인 프레임의 중요성을 부각했다. 코끼리를 생각하면 코끼리 프레임에 갇힌다는 것이다. 언론과 정치권은 대구경북(TK)을 흔히 '보수의 심장'이라 한다. 이번 지방선거 시기에 어떤 원로 정치평론가는 특정후보를 대구시장으로 뽑으면 "대구가 극우의 심장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는 TK의 정체성을 오독한 잘못된 표현이다.
TK는 보수의 심장이 아니라 '애국의 성지'다. TK의 역사는 지난 십수 세기동안 대한민국의 사상·실천의 중심에서 시대를 선도한 진취성의 역사였다. TK는 원효-일연-수운으로 이어지는 한국사상사의 도도한 주맥(主脈)이었다. 구한말 나라가 빚에 허덕일 때 가장 먼저 떨치고 일어난 국채보상운동의 발상지이자 일제강점기 항일독립운동의 중심지였다. 6·25 전쟁의 포화 속에서 목숨을 걸고 낙동강 전선을 사수해 대한민국을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구해낸 주역이 TK가 아니었던가. 4·19혁명의 도화선이 됐던 2·28 민주화운동의 발생지였고 오천년 가난을 물리친 새마을운동의 발상지였다. 25년 전 지방분권운동의 깃발을 가장 먼저 올린 곳이기도 하다. 늘 시대의 최전선에서 나라를 지키고 발전시켜온 선진적 지역을 어떻게 보수라는 단편적 프레임에 가둘 수 있단 말인가.
선거를 앞두고 TK는 큰 시험대에 올랐다. 여당 대구시장 후보가 중앙정부의 곳간을 열어 지역경제를 살려내겠다는 '지역 실리론'에 호소하는 전략을 폈기 때문이었다. '이번 기회에 말을 갈아타고 실속을 챙기자' '여당 후보가 단체장이 돼야 중앙정부의 돈이 풀려서 경제가 살아난다'는 말들이 시중에 떠돌았다. 오랜 경기침체에 지친 일부 민심이 실리와 명분을 두고 요동치기도 했다.
정치평론가 대부분은 TK가 특정정당을 일방적으로 지지해왔던 심층적 이유를 간파하지 못했다. 국민의힘이 비록 마음에 들지 않지만 자유대한민국을 수호하려는 의지만큼은 다른 당보다 낫다고 믿었기에 내린 차악의 선택이었다. TK의 선택 기준은 '우리 지역이 잘 사는가'가 아니라 '대한민국이 바로 서는가'였다. 지역 이익보다 국익을 우선하고 지역 걱정보다 나라 걱정을 먼저 해온 애국주의 역사가 바로 TK 정체성이었다.
다른 한편 이번 선거에서 TK는 중앙정부의 시혜성 예산을 기대하는 '의존 실리'를 뿌리치고 지역 내부의 혁신 역량을 강화해 스스로 강해지는 '자강발전의 길'을 선택했다. 중앙정부에 목매는 것이 아니라 강력한 지역혁신 역량을 바탕으로 로봇·데이터·AI 등 첨단미래산업 육성을 위해 중앙정부 투자를 당당히 받아내고 대기업도 유치해 스스로 부강해지는 '자력 실리'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이제 애국의 성지 TK가 갈 길은 명백해졌다. 한편으로는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헌법가치와 체제를 수호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탁월한 역사문화 자산과 인적자원을 최대 결집해 지역경제를 일으켜 세우는 자강발전의 대계를 완성하는 것이다.
이번 선거는 TK가 애국의 성지임을 다시 입증했다. 지역이기주의를 뛰어넘어 나라의 장래를 먼저 걱정하는 위대한 애국주의 신념이 살아있음을 증명했다. 지금 이 애국의 에너지를 바탕으로 30년 장기침체를 'TK 중흥 30년'으로 대전환해야할 역사적 과제가 있다. 대구시장과 경북지사가 원팀으로 애국시도민의 열정과 지혜를 결집해 이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
박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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