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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세상] 꿈속의 하얀 나비

2026-07-16 06:00
송종규 시인

송종규 시인

하얀 나비 한 마리가 곁에 와서 앉아 있다. 미동도 없는 나비, 고요한 정적 속에 묻혀 있는 나비, 사유 속에 깃든 나비, 나비는 꿈속에 남고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순결하고 진지했던 한 시절의 스냅 속에는 아직 날개를 접은 하얀 나비가 미동도 없이 앉아 있다.


수십 년이 지난 오래전 여름이었던 걸로 기억하고 있다. 약간의 긴장과 나른함으로 채워진 교실 안 책상마다 여름 햇빛이 걸터앉아 있었다. 교실은 조용했고 적막했고 열정적인 선생님의 목소리만 유리창에 부딪쳤다가 다시 돌아오곤 했다. 칠판에 적힌 부호들과 깨알 같은 숫자들이 머릿속을 채우다가 산산이 부서지기도 했는데, 나는 막연하게 미래에 대해서, 그 의심과 호기심으로 가득한 먼 시간의 동굴 속을 서성거리기도 했다. 수업시간에 이런 잡념이 스며든 것은 나른하고 나른한 여름 오후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수업에만 집중하기엔 변화무쌍했던 소녀들의 사춘기 증상 때문이었을 것이다. 시간은 흰 구름처럼 느리게 흘러갔는데 문득 열강하시던 선생님의 목소리에 삐끗 파열음이 생기고, 그때 한 친구가 키득키득 웃었던 듯하다. 웃음소리는 아주 나직했지만 불행하게도 교실의 적막을 깨우기에는 충분했던 모양이다.


선생님의 슬리퍼가 분노와 저주를 그 친구에게 마구 퍼부었을 때 교실에는 무겁고 낯선 공기가 연막탄처럼 드리워졌다. 나는 잠시, 구겨진 친구의 두 팔이 나비의 날개 같다는 엉뚱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내심 소심하고 비겁하게 분노하기도 했던 듯하다. 그날 선생님은 도대체 왜 그러셨을까. 몇 달 후 우리는 빛나는 졸업장을 받고 학교를 떠났고 소녀들의 사춘기는 세월 속에 아득히 묻혀갔다. 그러나 오래전 그 교실에는 아직도 날개를 접은 하얀 나비가 앉아 있다. 미동도 않는 나비, 파르르 떨고 있는 나비, 세월 속에 덩그러니 남아 있는 나비, 가엽고 순결한 하얀 나비.


이것은 잠시 꾼 여름날의 꿈일까, 아니면 내 시가 자주 차용하는 환유일까. 미래를, 오래된 미래라는 문장 안에 가둘 수 있다면, 오래된 과거를, 꿈이나 환유였다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나비는 꿈속에 남고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온 세계가 폭우와 불황과 폭염으로 들끓는데도 불구하고, 상처인 나비의 날개를, 언어로 치유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세상은 아름답다. 구겨진 아이들의 날개에 따뜻하고 고운 음계의 문장을 얹어주는 일은 이 시대 어른들의 책무일 것이다.


계간 '시인시대' 특집 여름호 '한국 명시 500선'을 읽다가 사무치는 그리움의 시, '파꽃'에 밑줄을 그었다. '파꽃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그냥 혼자 사무치자'라니!, '먼 기차 대가리야, 흰나비 한 마리도 들이받지 말'라니! '그냥' 아름답다.


이 세상 가장 서러운 곳에 별똥별 씨앗을 하나 밀어 올리느라 다리가 퉁퉁 부은 어머니


마당 안에 극지가 아홉 평 있었으므로


아, 파꽃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나는 그냥 혼자 사무치자


먼 기차 대가리야, 흰나비 한 마리도 들이받지 말고 천천히 오너라(안도현의 '파꽃'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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