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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회 달서책사랑 전국 수필 공모전] 이혜영의 ‘도서관, 사람과 사람을 잇다’ 전문

2026-08-31 17:26
도서관 전경. 게티이미지뱅크

도서관 전경. 게티이미지뱅크

도서관은 늘 고요한 곳이라고 생각했다. 빽빽하게 꽂힌 책들 사이를 천천히 걸으며 책장을 넘기는 소리만이 잔잔하게 흐르는 공간. 내게 도서관은 책을 읽고, 필요한 정보를 찾고,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곳이었다. 책은 늘 나의 좋은 친구였고, 도서관은 그 친구들을 만날 수 있는 가장 편안한 장소였다.


하지만 도서관에서 보낸 시간은 내 생각을 조금씩 바꾸어놓았다. 그곳의 고요함은 단순한 정적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추억이 머물고, 누군가의 삶이 이어지며, 아직 꺼내지지 않은 수많은 이야기가 숨 쉬고 있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서 책을 읽는 법뿐만 아니라 사람을 읽는 법도 배우게 되었다.


처음의 나는 평범한 독자였다. 책 속 문장에 기대어 위로를 받고, 이야기 속 인물들의 삶을 따라가며 공감하고 배우는 사람이었다. 힘든 날에는 책 속에서 위안을 찾았고, 외로운 날에는 이야기 속 친구들을 만나며 마음을 달랬다. 한 권의 책이 사람에게 힘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 힘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모습을 직접 보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 변화의 시작은 도서관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부터였다. 그림책 지도사 과정을 통해 다양한 그림책을 접하게 되었고, 짧은 문장과 소박한 그림 속에도 인생의 기쁨과 슬픔, 사랑과 그리움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린이만을 위한 책이라고 생각했던 그림책이 사실은 세대를 넘어 누구에게나 깊은 울림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 새롭게 다가왔다.


그림책 3급과 2급 자격증을 준비하며 나는 책을 읽는 방법뿐 아니라 사람에게 다가가는 방법도 배웠다. 같은 그림책이라도 읽는 사람의 목소리와 마음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는 사실이 인상적이었다. 그 과정 속에서 나는 어느새 '읽는 사람'에서 '전하는 사람'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자격증 취득 후에는 '마음 튼튼 그림책 교실' 자원봉사자 양성 과정에 참여했다. 혼자 생활하시는 어르신들을 위한 그림책 읽어주기 활동이었다. 교육을 받으면서 가장 크게 배운 것은 책 읽기가 단순한 낭독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중요한 것은 정확한 발음도, 유창한 진행도 아니었다. 어르신들의 눈빛을 살피고,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마음을 나누는 일이 더 중요했다.


실습은 지역 요양시설에서 진행되었다. 처음 어르신들 앞에 섰을 때 나는 몹시 긴장했다. 준비한 내용을 실수 없이 전달해야 한다는 부담이 컸다. 그러나 막상 그림책을 펼치고 읽기 시작하자 어르신들의 표정은 무표정했고 반응도 거의 없었다. 책장을 넘기는 내 손끝만 바쁘게 움직일 뿐이었다.


봉사가 끝난 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많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책만 읽고 있었지 사람을 보고 있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그 이후부터는 방식을 바꾸었다. 그림책을 읽기 전에 먼저 인사를 나누고, 오늘 기분은 어떠신지 묻고, 그림 속 풍경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누기 시작했다. 작은 대화가 이어지자 어르신들의 표정도 조금씩 달라졌다.


"저 꽃은 어릴 적 마당에 많이 피어 있었지."


"저런 시골길을 학교 다닐 때 걸어 다녔어."


짧은 한마디였지만 그 속에는 살아온 세월이 담겨 있었다.


어느 날이었다. 가족의 사랑을 다룬 그림책을 읽어 드리고 있었다. 한 장면을 보시던 어르신 한 분이 갑자기 눈시울을 붉히셨다. 그리고 한참 뒤 조용히 말씀하셨다.


"우리 엄마가 생각나네."


순간 방 안은 더없이 조용해졌다. 그 말 한마디에는 어린 시절의 기억과 그리움, 그리고 오랜 세월의 흔적이 담겨 있는 듯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어르신의 이야기를 들었다.


어르신은 잠시 후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가난했지만 따뜻했던 집, 새벽부터 일하시던 어머니, 손을 잡고 장에 가던 기억들. 그림책 한 권이 잊고 있던 기억의 문을 열어준 것이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림책은 단순히 읽는 책이 아니라 사람의 기억을 깨우고 마음을 위로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 이후 봉사 시간은 더 이상 내가 책을 읽어 드리는 시간이 아니었다. 함께 추억을 나누고 서로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 되었다. 어떤 어르신은 그림 속 감나무를 보며 고향집 마당을 떠올렸고, 어떤 어르신은 어린 손주의 얼굴이 생각난다며 미소를 지으셨다. 또 어떤 분은 오랫동안 말없이 계시다가 이야기가 끝난 후 조용히 "오늘 참 좋았어."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 짧은 말 한마디는 내가 받은 어떤 칭찬보다도 큰 힘이 되었다.


나는 봉사를 하러 간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내가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있었다.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법, 기다리는 법, 공감하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그림책을 통해 어르신들의 삶을 만나면서 나는 한 권의 책보다 더 깊은 감동을 느끼게 되었다.


이제 그림책은 내게 단순한 읽을거리가 아니다.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다리이며, 마음과 마음을 연결하는 따뜻한 매개체이다. 특히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은 어르신들에게 누군가와 마주 앉아 같은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시간이다.


도서관에서의 경험은 나를 변화시켰다. 책을 읽는 이용자였던 나는 이제 책을 통해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참여자가 되었다. 자격증 취득 과정과 봉사활동, 그리고 현장에서 만난 수많은 어르신들의 이야기는 내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 주었다.


이제 도서관은 더 이상 조용히 책만 읽는 공간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이야기가 이어지고, 서로의 삶을 이해하는 살아 있는 공간이다. 책은 그 중심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이어 주고 있다.


그리고 나 역시 그 안에서 작은 역할을 하고 있다.


한 권의 그림책을 통해 누군가의 하루에 미소를 더하고, 잊고 있던 추억을 떠올리게 하고, 외로운 마음에 따뜻한 위로를 건넬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나는 그림책을 통해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함께 웃고, 함께 추억하며, 따뜻한 시간을 나누고 싶다.


도서관에서 시작된 작은 만남이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되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희망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며 오늘도 나는 조용히 그림책 한 권을 펼친다.


그리고 책장을 넘길 때마다 문득 생각한다.


나는 책을 읽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읽고 있는 것이라고.



기자 이미지

박주희

현장의 목소리와 울림을 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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