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갛게 세수한 얼굴처럼, 더 없이 단정하다
![[테마가 있는 사찰 기행 .5] 영덕 장육사](https://www.yeongnam.com/mnt/file/201006/20100604.010400826410001i1.jpg) |
홍련암에서 바라본 장육사 일주문. 2009년에 낙성되었다. |
작정하고 비장감을 만드는 방법. 약간 흐린 날 레퀴엠을 한껏 틀어놓고 7번 국도를 달리는 것. 자주하면 감기와 같고 매일이면 중환자지만 가끔이면 정신 환기다. 영덕의 장육사 가는 길, 의미와는 상관없이 '장.육.사.'라는 음가의 무게는 천천히 떨어져 내리는 커다란 바위와 같아서 작정한 비장감을 그예 으깨어버린다. 정신이 가벼워진다.
◇ 운서산 장육사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이 시를 지은 분이 나옹스님이다. 영덕에서 태어난 스님은 스무 살 무렵 친구의 죽음을 보고 출가했다고 전해진다. 생에의 의문, 그 답이 저 시인지도 모르겠다. 장육사는 영덕의 운서산에 나옹스님이 창건한 사찰이다. 조선시대에 산불로 전소한 후 중건을 거듭했고 템플스테이를 진행하는 신축 건물이 더해져 오래되었다는 느낌은 별로 없다. 비구니 스님들의 절집이라 더 없이 단정하고 근래에 축조한 듯 보이는 반듯반듯한 돌계단들은 말갛게 세수한 얼굴처럼 느껴진다.
계단을 오르면 강당 건물인 흥원루가 맨 처음, 누의 아래를 지나 다시 몇 계단 오르면 대웅전 앞마당이다. 희디 흰 불두화가 탐스럽게 핀 대웅전 기단아래에 스님의 시구를 아기자기하게 적어 넣은 기와 몇 개가 기대 서있다. 대웅전 왼쪽으로 다시 몇 계단 오르면 관음전이다. 이곳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건칠관음보살좌상을 모시고 있다. 눈썹과 수염이 산적 같아 보이는 용왕상과, 쌍꼭지 머리를 한 귀여운 동자상이 좌우에 서있다.
문화재인 대웅전은 금단청이 화려하면서도 드물게 차분하고 선이 유려하다. 내부의 영산회상도와 지장탱화도 문화재로 가치가 높고, 천장의 주악비천상은 세이렌에 버금가게 시선을 뺏는다. 많은 탱화들 중 대웅전 벽에 그려진 문수보살을 깊이 바라본다. 최고의 지혜를 인격화한 보살이다. 나는 그것을 내 몸속에 집어넣고 부적처럼 움켜쥔다. 탐욕일까.
대웅전 뒷벽을 따라 걷다 어미 고양이와 두 마리의 새끼 고양이를 만난다. 어미는 새끼의 모가지를 물고 덤불속으로 사라진다. 남은 새끼 고양이는 바들바들 떨며 나를 바라보다 쌓아놓은 수키와 속으로 잽싸게 달아난다. 어떠한 위협을 가하지 않아도 존재 그 자체로 위협이 되는 건 억울한 일이다. 이건 성냄일까.
◇ 홍련암에서 일주문을 보다
대웅전 오른쪽에서 가파른 길을 조금 오르면 홍련암이다. 나옹스님이 토굴을 짓고 수행하던 터에 지은 암자로 지공, 나옹, 무학스님을 모시고 있다. 홍련암 오른쪽 경사진 내리막에는 청청한 대숲이 가장자리를 두르고 있고 왼쪽 한 걸음 물러선 자리에 부끄러운 듯 짧게 걸쳐진 빨랫줄, 물 향기 나는 홑이불 하나 새침하게 걸려있다. 빙그르르 돌아 먼 산 바라보다 숲으로 둘러싸인 옹달샘 같은 일주문을 본다. 걸어 찾아드는 이에게만 열린 저 문이, 물처럼 바람을 들이고 있다. 점심 공양을 마친 스님의 목탁소리가 아래로부터 날아오르고 공양간 보살님 텃밭으로 내려선다. 배가 고파진다. 생은 얼마나 육체적인 것인지.
◇ 화수루와 까치구멍집
2층의 누각건물이 강철로 만들어진 육중한 성문처럼 정적을 지키고 있다. 화수루, 이름이 아주 예쁘다. 17세기에 지어졌다는 안동 권씨의 재실 건물로 앞에는 누각이, 뒤쪽에는 방으로 구성된 ㅁ자형의 가옥이다. 이곳은 단종의 외삼촌인 권자신이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발각되어 화를 당한 후 유일하게 살아남은 어린 아들 권책이 유배되어 여생을 보낸 곳이다. 비와 바람과 태양 아래서 늙어온 건물, 낯설지 않게 개성적이지만 어쩐지 심해와 같은 숨 막힘이 엄습해온다.
누각 아래의 문이 잠겨 있다. 건물을 한바퀴 돌다 열린 문을 밀고 들어선다. 부엌이다. 불구멍 주위를 벌들이 날아다닌다. 오디만큼 크고 로봇처럼 강해 보인다. 살아있는 것들이라곤 그 맹렬한 것들이 전부다. 빛들도 퇴각하는 군인들처럼 어깨가 처졌다. 밖에서 본 성 같은 굳건함 대신 낡고, 썩고, 허물어져 으스스한 분위기마저 감도는 폐가의 모습이다. 중정은 생각보다 좁아 구조 자체에서 오는 폐쇄된 분위기가 더욱 짙다. 다만 누마루로 오르는 멋있는 계단이 거칠고도 기능적인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사람의 기운이 없어서일까. 관리되지 않아서일까. 유배지로서는 섬 보다 더욱 가혹하다는 느낌이 든다.
화수루 옆에 자그맣게 웅크린 집은 화수루에서 일하던 사람이 살았던 집이다. 굴뚝 없이 지붕에 새가 드나들 정도의 구멍을 내어 놓았다고 해서 까치구멍집이라 불린다. 방 앞에 마루가 있고, 마루 앞에 봉당, 그리고 바로 외양간이 있다. 봉당과 외양간 뒤쪽에 부엌이 붙어 있다. 마루에 걸터앉으면 코앞에서 소가 여물을 먹고 있었을 것이고 여인은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을 것이다. 화수루와 까치 구멍집 앞에는 계곡이 흐르고 있다. 물소리만 들려오는 산중, 누각에 올라 계곡을 바라보고 물소리 듣는 것만이 자유로웠을지도.
#찾아가는 길
대구∼포항 간 고속도로 이용, 포항에서 7번 국도를 타고 영덕 방향으로 간다. 영해 네거리에서 창수, 영양 방면 918번 지방도로 빠져 장육사 이정표를 따르면 된다. 갈천리 버스 정류장을 지나면 먼저 화수루와 까치구멍집이 나오고 다시 갈림길에서 우회전하면 장육사다.
![[테마가 있는 사찰 기행 .5] 영덕 장육사](https://www.yeongnam.com/mnt/file/201006/20100604.010400826410001i2.jpg) |
장육사 경내 풍경. 장육사는 1355년에 창건된 사찰로 불국사의 말사이다. |
![[테마가 있는 사찰 기행 .5] 영덕 장육사](https://www.yeongnam.com/mnt/file/201006/20100604.010400826410001i3.jpg) |
나옹선사가 토굴을 짓고 공부하던 터에 지은 홍련암 |
![[테마가 있는 사찰 기행 .5] 영덕 장육사](https://www.yeongnam.com/mnt/file/201006/20100604.010400826410001i4.jpg) |
1676년에 지어진 안동권씨의 재실인 화수루. 국가 주요 민속자료다. |
![[테마가 있는 사찰 기행 .5] 영덕 장육사](https://www.yeongnam.com/mnt/file/201006/20100604.010400826410001i5.jpg) |
화수루의 부속 건물인 까치구멍집. 별도로 굴뚝 을 만들지 않고 지붕에 새가 드나들 만한 정도의 구멍을 내어 환기시키게 만든 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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