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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齋 서병오 .6] 석재의 일본 방문

2012-01-04

현해탄 넘은 ‘팔능거사’ 명성…日 정계 거물과 교류
대정치가 도야마 등 초청으로 세차례 다녀와
서화가·석학들에 ‘세기의 위재’ 격찬 받기도
석곡 이규준에 틈틈이 한의학 배워 의술에 능통

20120104
일본 방문 때 도야마 미쓰루(왼쪽)를 비롯한 일본 인사들과 기념촬영한 석재 서병오(가운데).

석재의 두 차례 중국 주유는 그 특출한 재능을 드날리는 기회이기도 했지만, 스스로도 청나라 말기의 다채로운 서화풍을 접하면서 부족한 부분이나 장점을 선택적으로 수용하는 소중한 계기가 되었다.

중국 주유를 통해 화국지재(華國之才)라는 명성을 듣던 석재는 귀국 후 작품세계에 큰 변화를 보인다. 석재가 중국에 가기 전 작품과 귀국 이후의 작품을 비교해보면 확연히 그 변화가 드러난다. 화풍이 일변해 탈속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평가를 하기도 했다.

서예가 김태정씨(전 대구예술대 교수)는 “석재가 중국에 가기 전까지는 붓을 꼿꼿이 세워서 쓰거나 그릴 줄만 알았지 눕혀서 쓰는 법을 몰랐던 것이 사실인데, 중국에 다녀온 후부터는 명가들의 운필법을 보고 드디어 임리(淋)하다는 의미를 깨닫게 되고 ‘맑고 바른 촌스러움’을 벗어 던질 수가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고 평했다.

◆일본 정계 거물의 초청으로 일본 방문

석재가 두 번째 중국 주유 후 귀국했을 때 국내는 한일강제병합 등으로 매우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한편 일본에는 일본화를 부활시킨 화가 요코야마 다이칸(橫山大觀: 1868∼1958)이 일본미술원을 중심으로 크게 활약하고 있었고, 일본 문인화 대가인 도미오카 뎃사이(富岡鐵齋: 1837∼1924)도 70대 중반의 고령임에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석재는 중국에서 귀국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런 분위기의 일본에도 건너가 그 명성을 떨치게 된다. 정계 거물이자 문필가인 도야마 미쓰루(頭山滿: 1855∼1944)의 초청으로 일본에 건너가는 등 일본 유명 인사의 초청을 받아 세 차례에 걸쳐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보이는데, 그 시기가 언제인지 분명하게 확인되지는 않고 있다.

첫 일본 방문은 2차 중국 주유에서 돌아온 후 얼마 지나지 않은 때인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일본에는 칠곡군수를 지낸 석재의 동생 서병위(徐丙緯: 1872∼1919)가 도야마 미쓰루의 집에 머물고 있었다. 그를 통해 석재의 명성을 들은 도야마가 석재를 초청한 것이다.

석재는 동생과 함께 그의 집에 머물면서 일본의 예술인, 정치인 등과 어울리는 교유를 통해 일본에 일대 신풍을 일으켰다. 도야마 또한 석재처럼 호방한 성격의 소유자로, 서화도 잘 하고 주색을 좋아하는 호걸이어서 두 사람은 바로 의교(義交)를 맺을 정도로 호흡이 잘 맞았다.

석재의 거처에는 각계 각층의 유명인사가 찾아들어 시서화, 바둑 등으로 교유했다.

근세 일본의 대정치가이며 국수주의자였던 도야마는 중국의 쑨원, 한국의 김옥균 등 당시 일본에 망명한 혁명가들을 돕기도 한 인물이다. 일본 정계와 재계를 막론하고 배후에서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실력자였다.

이후 두 차례 정도 더 일본을 다녀왔다. 석재는 이런 일본 방문을 통해 도야마뿐만 아니라 일본 화단의 대표이며 이론가이자 현대서예의 아버지라 불리는 히다이 덴라이(比井田天來 : 1872∼1939), 문인화 대가인 도미오카 뎃사이, 정치가 오쿠마 시게노부(1838∼1922)와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 : 1855∼1932), 문학박사인 데라오 토오루(寺尾亨 : 1859∼1925), 승려 스즈키(鈴木) 등과 문묵으로 교유했다.

일본 서화가나 석학들은 석재를 ‘세기의 위재(偉才)’라고 칭찬하는 등 석재의 작품세계를 높이 평가했다. 이누카이 츠요시는 오쿠마 시게노부에게 석재를 소개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는데, 이는 당시 일본인 사이에서 석재의 위상이 얼마나 높았는지를 보여주는 일이라 하겠다.

도야마의 초청으로 일본을 방문했을 때 사경을 헤매는 그의 손자를 석재가 부자(附子)를 사용해 생명을 구해 주었고, 그는 고마움의 표시로 귀중한 소동파의 서첩 한 권을 선물했다. 그 서첩은 석재 사망 후 엄청난 가격으로 다시 일본으로 팔려갔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바둑 두다 뇌일혈로 졸도하기도

신대식 저 ‘석재 서병오’에 따르면 석재는 72세 되던 해(1933년)에는 이누카이 츠요시의 초청으로 일본으로 건너간다. 이 때 일본 각 대학의 한학교수와 서화가, 문인, 기사(棋士)들이 도쿄에 있는 석재의 숙소를 방문해 문묵을 나누고 바둑을 두며 어울렸다. 특히 이누카이(일본기원 3단)와 바둑 대국에서 연이어 2회를 이기고, 3회 대국 중에 고혈압으로 인한 뇌일혈로 졸도하는 일이 일어났다. 일본 각계 인사의 간병과 도움으로 건강을 회복하고 귀국할 수 있었다.

석재는 일본에서의 졸도 이후 바둑을 직접 대국하는 일은 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의 대국을 관전하며 지도했다고 한다.

석재와 도야마의 각별한 교류를 알 수 있는 흔적으로, 석재가 그에게 써 준 오언절구의 시가 있다.

‘서로 마음이 맞는 바에야(自有心同照)/ 어찌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방해받으리오(何妨語不通)/ 서로 말 없이 보고 웃으니(相看默相笑)/ 조각달은 하늘에 걸려 있네(片月掛長空)’

언어가 달라 말이 통하지 않지만, 서로 마음으로 충분히 교유했음을 보여준다. 이와 함께 그들이 함께 찍은 사진도 지금까지 남아있어 서로의 교유가 깊었음을 알 수 있다.

석재가 일본 인사들과 교유할 때는 중국에서처럼 긴요한 것만 필담으로 하고, 일상 용어는 동행한 사람을 통해 통역하게 했다고 한다.

◆석재와 석곡 이규준

도야마의 손자를 살려낸 석재가 중국 주유 때 포화의 병도 치료해준 데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의술에도 매우 뛰어났다.

석재가 의술에 능통하게 된 데는 석곡(石谷) 이규준(李圭晙: 1855∼1923)의 영향이 크다. 경북 영일 출신인 석곡은 독학으로 주역, 천문, 지리, 이학(理學), 의학에 능통하게 된 대학자였다.

그는 원래 유학자로서 경사자집(經史子集)에 능통하였다. 인생 후반에는 의학연구에 전념하여 의학서적인 ‘황제소문절요(黃帝素問節要)’ ‘의감중마(醫鑑重磨)’ 등을 펴내기도 했다.

석재는 석곡과 특히 이학에 서로 통했고, 석곡의 심오한 지식과 획기적인 이학해석 및 철학적 논단에 각별한 찬사를 보냈다.

석재는 학자이며 한의사인 석곡에게 틈틈이 한의학 등을 배웠다. 석곡은 한방에서 사용하기 어려운 부자(附子)를 잘 써서 ‘이부자(李附子)’라고 불릴 정도로 뛰어난 명의였다. 그의 저서 ‘포창기문(褒彰紀文)’은 중국에서 출판돼 중국 학자들로부터 절찬을 받았다. 그리고 석재와 석곡이 공동 연구해 조제한 ‘통치환(通治丸)’은 소화불량 환자와 허약자에게 탁월한 치료제로 통했고, 당시 전매특허를 획득하기도 했다.

석재는 그에 대해 “비록 파관폐의(破冠弊衣)하고 초야에 은둔한 학자이나 그 심오한 지식과 획기적인 이학해득, 명쾌한 철학적 논단은 수백년 내지 수천년을 통한 어떠한 거유도 여기에 도저히 따를 수 없다”라고 극찬했다.

세상의 식자들은 석재 같이 탁월한 인물이 그처럼 칭송하는 석곡이 어떤 인물인지 의아해할 정도였다. 그런 석곡은 석재의 추천으로 인해 일약 그 존재가 대구는 물론 경향각지의 유학자 및 한의학자들에게 유명해지게 되었다.

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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