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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국민타자의 아버지로 산다는 것은?

2013-03-29

프로야구 삼성 이승엽 선수의 아버지 이춘광씨 내 아들 승엽이를 말하다
“감독들도 모를 겁니다, 제가 그놈 자료를 25년간 35권이나 스크랩한 걸”
※생애 첫 홈런 친 초등 6년부터 모은 한국야구사의 귀중자료로 언론 첫 공개

국민타자의 아버지로 산다는 것은?
이춘광씨는 아들 승엽이 처음 야구를 시작할 때 자만심에 빠질까 싶어 절대 칭찬을 하지 않는 대신, 야구 관련 기록은 빠트리지 않고 꼼꼼하게 정리하면서 이 선수의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다.

스타 플레이어(star player).
맘만 먹으면‘황제’처럼 군림할 수 있게 된 세상이다.
그들에겐 모든 기회가 최우선으로 주어진다. 그래서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은 다 돈과 결부된다. 모두의 부러움을 산다.

병 주고 약도 주고 싶은 게 팬의 고약한 속성. 민초급 팬들은스캔들 같은 치명적인 소문도 거르지 않고 마구 확대재생산한다. 스타 탄생에 환호성을 보내던 바로 그 팬들이 스타의 추락도 은근히 즐긴다. 그 흐름을 너무나 잘 아는 스타플레이어와 그 가족들은 가능하면 와이드인터뷰 같은 걸 꺼린다. 그 때문에 우리는 스타 플레이어를 겉만 알기 십상이다. 인간적인 면모는 거의 가려지게 마련이다.

이승엽. 올해 38세의 이 사내는 한국야구사상 최정상급 스타 플레이어다. 굳이 이런 자리를 빌려 그의 화려한 전적을 미주알고주알 들춰낼 필요는 없을 듯싶다.

그런 이승엽에게도 가슴 아픈 날이 있었다. 억대 도박 파문에 연루됐다는 보도 때문이다. 누구보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사람은 아버지 이춘광씨(70)였다.

‘승엽이가 그럴 애가 아닌데’ 하면서도 혹시 순간적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고 도박판에 휩쓸렸을 가능성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아니야, 승엽이는 절대 그런 애가 아니야. 누구보다 가정교육을 잘 받은 아인데’라면서 도박을 ‘했다’와 ‘안 했다’ 사이를 오가면서 전전반측한다. 어렵사리 아들과 전화통화가 됐다.

“승엽아,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

“아버지, 전 아니에요. 일단 저만 믿으세요.”

결국 아들의 말이 옳았다. 프로 세계의 구설은 그렇게 느닷없고 중구난방이다.

“정말 속이 상하더라고요. 명예훼손 혐의로 언론사를 상대로 고소도 하고 싶었지만 스타 플레이어라서 그냥 지나갈 수밖에 없었죠.”

이 선수의 아버지는 2007년 아내와 사별하고 지금은 대구시 수성구 두산동의 한 아파트에 살고 있다. 더러 인터뷰 요청이 있지만 아들을 위한다는 마음 때문에 언론과의 접촉은 일체 피한다. 그런 가운데 어렵사리 아버지와의 인터뷰가 성사됐다.

두산동 아파트와 동구 신천동의 한 고향 후배 사무실에서 두 차례였다.

이승엽은 아버지를 빼닮았다. 특히 코 부분은 복사한 것 같았다. 아버지는 상당히 과묵하고 신중했다. 자신이 언급한 말의 토씨 하나까지도 세심하게 살필 정도였다.

“말이 많으면 쓸 말은 그만큼 적죠. 특히 유명 선수와 그 가족의 얘기는 자칫하면 팬들에게 아주 자극적으로 전해질 수도 있어 저는 그동안 인터뷰를 멀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침묵은 일종의 아들 때문에 지불해야 하는 ‘유명세’였다.


태몽은 똬리 튼 뱀이
천원짜리 물고 있는 꿈
초등1년 때 생일선물로
야구배트 사달라 해

야구만 시켜주면 절대
속 안 썩이겠다 하더라
평범히 살길 바랐는데…

6학년때 전국대회 홈런
승엽 운명에 결정打…
‘줄빠따’ 치던 중학교 땐
팬티에 오징어 넣고 등교
포기하겠단 말 안 해

야구선수는 유목민
내 생일에도 못 만나…
‘새로 나온 휴대폰 사게
아버지 지금 나오세요”
효심 매우 구체적


◆ 1988년 10월7일 바로 그날…

국민타자의 아버지로 산다는 것은?
이승엽 선수가 중앙초등 6학년 시절 전국 소년야구대회에서 투런 홈런을 치고 홈으로 들어오는 장면이 담긴 신문기사.

1988년 10월7일 소년조선일보 스포츠면.

홈런을 치고 홈으로 뛰어들어오는 야구선수 사진이 실려있다. 바로 이승엽이다.

아버지는 그날부터 아들을 위해 신문 스크랩을 하기 시작한다. 25년 전 사진은 빛이 바랬다. 당시 이승엽은 중앙초등 6학년1반 학생. 학우들이 자랑스러운 승엽이를 생각해 ‘우리학교 야구왕’이란 제목을 적어 교실 뒤 게시판에 붙여 둔 걸 아버지가 복사해 원본과 함께 보관하고 있었다.

- 이 선수의 야구입문기가 궁금하네요.

“1982년 프로야구가 태동하던 해에 승엽이가 중구 삼덕동 동덕초등에 입학했어요. 그해 음력 8월18일에 생일 선물로 뭘 해줄까 물었어요. 다른 아이 같으면 케이크 같은 먹을 걸 사달라고 할 건데 그 아이는 야구 방망이와 글러브를 사달라고 하더군요. 대구교대 앞 문구점에서 사주었죠. 동부교육청 주최 공던지기대회에 학급 대표로 출전했어요. 당시 중앙초등 신용성 야구부장이 운동장에 나와서 승엽이를 유심히 살폈어요. 승엽이는 그날 3등을 했는데 왼손잡이고 손이 다른 아이들보다 더 두툼한 걸 보고 무척 탐냈어요. 승엽이는 신 부장이 야구선수 의향을 묻자 단번에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할 정도로 적극적이었습니다.”

- 승낙했습니까.

“지금과 달리 그때만 해도 운동선수의 앞날에 대한 그 어떤 희망적인 징조도 없었어요.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평범하게 살기를 바랐어요. 그런데 신 부장은 정말 집요한 분이더라고요. 네 차례나 저를 찾아와서 ‘승엽이는 충분히 자질이 있고 실제 자기 아들도 동아대 야구선수라면서 초등학교 때 시켜보고 안 되면 그때 그만두자’고 간청했습니다. 결국 내가 설득당하고 말았죠.”

- 그럼 전학을 가야 되잖아요.

“4학년 때 중앙초등 야구부로 전학을 갑니다. 저는 아이가 정말 싹수가 있는지 치밀하게 분석해보고 싶었어요. 매일 멀찌기 떨어져서 운동하는 걸 관찰했습니다. 다른 학부모는 아이에게 다가가 음료수를 사주기도 했지만 저는 절대 ‘오냐, 오냐. 힘들지 내 새끼’, 이런 식으로 맹목적으로 칭찬만 해선 절대 성공할 수 없다고 봤어요.”

- 초등학교 때 가능성이 보이던가요.

“야구부원이 된 그해 포항제철 회장배 전국야구대회가 포항에서 열렸어요. 거기서 첫 안타를 쳤죠. 2년 뒤 제10회 전국어린이야구대회가 서울 장충단공원에서 열렸어요. 중앙초등은 옥산·칠성·남도·수창을 꺾고 서울로 갑니다. 그날 승엽이가 4회초에 투런 홈런을 쳤고 그 덕분에 전국 4강에 듭니다. 승엽이 운명은 그날 결정된 겁니다. 대구로 오니 지역 중학교 야구부 감독으로부터 다양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어요. 당시 야구부가 있는 중학교는 대구·경상·경원·경복중이었는데 승엽이는 경상중으로 갑니다.”


◆ 25년간 계속된 아버지의 신문 스크랩북

국민타자의 아버지로 산다는 것은?
이춘광씨가 25년간 축적해 온 이승엽 선수 관련 스크랩북. 이 자체가 한국야구사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방대한 자료를 담고 있다.

- 사춘기로 접어들면서 이 선수가 야구하기 싫다고 하지는 않았나요.

“중학교 때는 팀워크가 약해 별로였습니다. 구타도 심했어요. 어떤 날에는 줄빠따에 대비해 마른오징어를 팬티 안에 넣고 가는 걸 봤습니다. 하기 싫어하는 모습이 역력했습니다. 하지만 승엽이는 제게 하지 못한다는 말을 못하게 돼 있어요. 야구부에 들어가기 전 그놈이 ‘아버지, 저 야구만 시켜주면 야구 잘하고 절대 속 안 썩일게요’라고 확언을 했어요. 자기가 한 말이 있으니 절대 식언을 할 수가 없죠.”

- 아버님은 어떻게 그렇게 승엽이 지난 야구 역사를 그렇게 정확하게 아세요.

“그놈이 생애 처음 홈런을 치던 그해부터 25년간 단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관련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승엽이가 초등학교 때 직접 작성한 육필 전적표도 갖고 있어요. 선수는 바빠서 스크랩할 겨를이 없어요. 누가 챙겨줘야죠. 제가 자료 챙기는 매니저가 된 겁니다. 그렇게 모으다보니 35권이 됐군요. 칼에 손을 베어 8바늘을 꿰매기도 했습니다.”

- 한국 야구사의 압축파일 같습니다. 훗날 이승엽 자료관이 생긴다면 제일 귀중한 콘텐츠가 될 것 같습니다만.

“제가 이런 자료를 갖고 있다는 거 감독들도 모를 겁니다. 언론에도 처음 공개합니다. 그런데 그놈은 ‘아버지, 뭣하려고 그러세요’라더군요. 그럼 저는 속으로 ‘야, 이놈아. 훗날 이 방대한 자료를 보면서 나한테 큰절을 할 거여’라며 스스로를 위안했어요. 제가 이렇게 스크랩북을 만든 건 이 아이가 나와의 첫 약속을 어디까지 지킬 건지 그리고 언제 야구를 그만둘 것인가를 예의주시하고 싶었기 때문이죠. 그리고 그만두고 싶다고 할 때 이 자료를 내밀면 아이가 벌떡 일어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 효자 이승엽

-아들과 밥을 같이 먹을 시간이 있습니까.

“잘난 아들 결국 나라에 뺏긴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잖아요. 저도 구단에 승엽이를 뺏겼어요. 제 생일에도 볼 수가 없어요. 그는 유목민처럼 떠돌아다니면서 생활합니다. 경기 직후 두산동 아파트에서 함께 식사할 거라고 보지만 전혀 아닙니다. 안 봐도 자식이니 이심전심이죠.”

- 효자라고 하던데요.

“효심 없는 자식이 어디 있겠습니까만 승엽이는 효심이 매우 구체적이죠. 제 휴대폰이 좀 낡았다 싶으면 귀신처럼 알고 전화를 해요. ‘아버지, 지금 대구체육관 근처인데 나오세요. 새로 나온 휴대폰 사게요.”

- 승엽씨한테 경제적으로 도움을 많이 받나요.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저는 배운 것도 없고 그냥 지역에서 건설업을 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97년 대구의 유수업체로부터 부도를 맞았어요. 액수가 상당했고 위기였죠. 그 순간 이런 사실을 절대 승엽이한테는 알리지 말자고 다짐했죠. 자칫 승엽이가 슬럼프에 빠질 것 같아서요. 나중에 알고 적잖게 걱정하더군요. 그때 사업을 접었습니다.”

- 남들이 아들 잘 뒀다고 부러워하죠.

“그 부러움이 제겐 부담이고 빚이죠. 그걸 갚기 위해 힘닿는 대로 이웃에 베풀려고 합니다.”

(이씨는 지난해 승엽이가 한국시리즈 MVP가 됐을 때 아파트 경로회를 위해 지난 3월에는 고향에서 잔치를 벌였다. 강진 베이스볼파크에 표지석도 기증했다.)


◆ 삼덕동에서 승엽이를 낳았다

- 슬하에 가족은 어떻게 되죠.

“저는 전남 강진에서 태어났어요. 조부는 고향에서 변변찮은 서당 훈장 노릇을 했고, 아버지는 그냥 가난한 농부였어요. 승엽이는 셋째이고, 장녀 현주는 달서고에서 체육선생으로 있습니다. 장남 종호는 서울의 한 제약회사에 다니고 있어요. ”

-대구와의 인연은 어떻게 되죠.

“대구2군사령부 통신근무대 타자병으로 복무했습니다. 제대한 뒤 고향에 가서 공무원 공부를 하다가 친구의 권유로 67년 서구 내당동 반고개 근처에 있는 삼성섬유에 취직합니다. 이후 건설업 외길을 걸었어요.”

- 이 선수는 어디서 출산했죠.

“제 신혼집은 중구 공평동 법원 주차장 바로 옆에 붙은 슬레이트 집이었습니다. 승엽이가 태어난 집은 삼덕2가 140-13번지인데 지금 그 집은 유료주차장으로 변했어요.”

-태몽은 꿨습니까.

“뱀이 똬리를 튼 채 천원짜리를 물고 있었다더군요. 새벽 3시 중구 서성로의 모 산부인과에서 해산했죠. 작명도 범어동의 한 철학관에서 했어요.”

(이 선수는 자신의 첫아이를 일본 도쿄에서 봤다. 출산 소식을 듣자마자 홋카이도에서 택시를 타고 신생아실로 달려왔다.)

- 체격이 운동선수 같은데 야구도 해보셨어요.

“승엽이 초등학교 야구부 시절 선수 부모끼리 모여서 야구를 해봤는데 잘 못하겠더라고요.”

(그는 요즘 경산의 한 텃밭을 돌보며 소일한다. 프로야구 시즌에는 이 선수 경기 중 4분의 3은 관람한다. 대구시민운동장 본부석 나열에는 그의 고정석이 있다. 아버지의 인생은 이 선수의 유명세 때문에 일정 부분 위축받고 있음이 분명했다. 정상에 오지 못하고 중도에 낙마한 숱한 프로 선수들과 그 부모들 때문에 그는 대놓고 자기 아들을 자랑할 수 없었다. 물론 자랑해도 누가 뭐라고 하진 않겠지만 그는 스스로 자제하는 성정을 갖고 있었다. 영광이 주는 하나의 ‘그늘’로 보였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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