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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사라진 잔구(殘丘)와 고개

2013-11-22
지명은 조상의 정신문화유산이다.

2008년 김광순 택민국학연구원장 등이 펴낸 ‘대구지명유래총람’은 대구지역의 산·강·고개·거리·들·집터·산성 터·동명 등 지명유래를 체계적인 조사를 통해 집대성한 책이다. 이 책은 1980년 대구시 행정자료실에서 낸 지명조사와 ‘한국구비문학’에서 일부 소개된 지명유래를 총체적으로 다뤘다. 책 속에는 고개와 재의 유래도 담겨있다. 하지만 자연부락 중심으로 소개하다 보니 누락된 고개도 있다. 대구지오는 새롭게 알려진 고개를 비롯해 최근 변화된 고개의 모습까지 함께 소개한다.

김 원장은 “동네 명칭은 물론 한 그루 나무, 바위, 이름 없는 돌무덤까지 우리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고 했다.


◆중구

▲연귀산= 서거정의 대구10경 가운데 귀수춘운(龜峀春雲)에 나오는, 현재는 사라진 산이다. 중구 봉산동 230의 1과 남산1동 일대다. 달맞이를 하는 산이라 해서 ‘월견산(月見山)’ 또는 거북바위가 있다고 해서 ‘거북바위산’이라고도 불렸다. 일제강점기 정오를 알리는 대포를 쏘았다고 해서 ‘오포산(午砲山)’이라고도 했다.

해발 65m 정도로 그리 높지 않지만 대구도호부시기에는 대구에서 가장 높은 진산이어서 정상에 오르면 산지사방을 훤히 볼 수 있었다. 서낭당이 있어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 1665년 조선 현종 때 구계 서침의 덕을 기려 이곳에 구암서원을 세웠다. 근대에 이르러 학교와 병영이 들어서고 미국통신대가 주둔하면서 봉우리가 깎여나갔다. 바위로 된 평평한 잔구(殘丘) 정상에는 현재 제일중학교가 자리 잡고 있으며, 교정에 있는 거북바위가 옛 연귀산의 영화를 대변해주고 있다.

거북바위는 대구분지가 불의 기운이 강해 이를 무마하기 위해 비보풍수차원에서 1천년 전에 묻은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연귀산은 일제강점기 대구측량의 원점이기도 했다. 현재 동쪽으로 센트로팰리스, 북쪽으로 봉산동 뜨란채 아파트, 서쪽으로 건설 중인 29층 주상복합아파트가 자리하고 있다. 사방으로 아파트 숲만 보이는 셈이다.

▲아미산= 풍수지리에서 대구의 지맥은 비슬산~앞산(성불산)~삼봉산(수도산)~연귀산으로 이어져 아미산에서 정점을 찍는다고 한다. 임진왜란 후 대구에 귀화한 명나라의 풍수지리참모 두사충은 처음 아미산에서 남쪽으로 1천 걸음을 걸어 경상감영 자리를 자신의 집터로 삼았다. 아미산은 중구 남산2동에 있던 야트막한 돌산이었다. 무당과 보살이 많아 ‘무당골’로도 불렸다. 지금도 무당집과 불교 관련 가게가 밀집해 있다.

아미산의 명칭은 1910년 보현사가 들어서면서 중국 쓰촨성에 있는 어메이산(峨嵋山) 진딩쓰(金頂寺)의 보현보살에 기원한다는 설과 초승달 같은 미인의 눈썹(蛾眉)에 기원한다는 설이 있다. 이곳은 읍성시기 영남제일관 남쪽에 위치해 남산(南山)으로 불렸다.

반월당~명덕네거리 대로를 내기 전까진 남산과 연귀산이 나지막하게 연결돼 있었다. 아미산엔 내년 100주년을 맞이하는 남산교회와 가톨릭성지인 관덕정, 상덕사, 문우관 등 유교·불교·가톨릭·기독교 건물이 함께 있다. SK허브스카이 자리에는 대륜학교의 전신인 교남학교가 위치했다. 대구동부교육지원청은 김울산이 세운 복명학교였다. 아미산에는 한옥과 골목이 일부 남아있지만 반월메디컬타워, 동양생명, 삼정그린코아아파트와 같은 대형 빌딩숲에 싸여있어 산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절단고개= 중구 남산4동 현 동산내과의원 부근에 있던 고개다. 일명 ‘군청말랭이(산마루)’라고도 한다.

군청말랭이 또는 군청만댕이는 현 대구백화점 주차장 북편에 있던 달성군청사가 평지보다 높아 동성로 2가 일대라는 설도 있다. 이 고개는 대명동이나 월배 지역 주민들이 대구읍성으로 들어오는 남쪽 지름길이었다. 이곳에 서면 동산과 대구시내의 모습이 훤히 보였으리라. 대명동과 남산동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이곳에선 해마다 한 번씩 줄다리기 행사가 열렸다고 한다.

절단의 ‘절단나다’는 ‘결딴나다’의 사투리로 망가져 도무지 손을 쓸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2000년 지하철2호선 공사 당시 절단고개 북편 남산동 신남네거리에서 도로붕괴사고로 버스가 추락해 절단(?)나기도 했다. 지금은 남산그린타운, 남산휴먼시아 아파트가 들어서 자취를 찾을 수 없다.



◆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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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고개는 80년대 이후 무침회거리로 전국에 명성을 떨치고 있다.


▲반고개= 반고개네거리에서 서쪽 방향 달구벌대로의 내당1동과 내당2·3동을 연결하는 언덕이다. 달구벌대로는 내당동과 두류동을 나눈다. 반고개는 대구읍성 내로 시집 온 성외 출신 새댁이 명절 때 친정에 갈 형편이 안 돼 고개 반쯤에서 성외로 시집 간 새댁과 안부를 묻곤 했다고 해서 반고개로 불렀다는 설이 있다. 또 강창과 다사지역, 호남지역 상인들이 고개를 넘다 떼강도를 만나 고개를 반밖에 못 넘어서 반고개로 했다는 설이 있다.

이 밖에 고개가 가파르고 바람이 세차서 바람고개, 강도 때문에 밤이 되면 넘지 못한다고 해 밤(夜)고개, 밤나무가 많아서 밤고개라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서울에도 반고개가 있다. 강남구 세곡동 반고개는 남쪽으로 1천리면 부산, 북쪽으로 1천리면 의주라서 반고개라 불렸다고 한다.

반고개는 1980년대 이후 달구벌대로가 생기면서 무침회거리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반고개 옛길 고개 입구 동편과 서편 고갯마루에 각각 ‘반고개무침회골목’이란 간판이 있으며, 서편 고갯마루에 반고개유래 표지석이 있다.

이곳의 원조는 전라도 출신 사장이 경영하던 호남식당이다. 하지만 이 식당은 주인이 여덟번이나 바뀌었다. 호남식당과 비슷한 시기에 개업한 똘똘이식당은 원래 돼지국밥집이었으나 80년 강점자씨가 무침회로 업종을 전환한 뒤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옛 삼영식당인 반고개무침회식당(대표 김길성)은 84년 개업해 반고개무침회를 전국적으로 알린 주인공이다. 현재 그의 아들이 대를 잇고 있다. 이곳엔 현재 15개의 무침회식당이 밀집해있다.

김길성씨는 “무침회거리의 전성기는 1980년대말~IMF 외환위기 전까지였다. 거리에 콩나물시루처럼 사람이 많이 붐볐다. 단체 손님은 주로 성서공단 근로자들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퀵서비스가 생긴 후부터 회식손님보다 배달의 비중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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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개시장 들머리. 원고개는 서구 비산1동 원고개시장 일대 다.


▲원고개= 서구 비산1동 원고개시장 부근의 구릉이다. 옛날 원님이 이곳을 지나다녔다는 설, 대구사또가 이·취임할 때 고개를 지나다 쉬었다는 설, 새로 부임한 원님이 고개를 넘다 죽어 원고개로 부른다는 설이 있다. 실제 비산6동에 ‘원묘’라는 무덤이 있어 주민들이 제사를 지냈다. 비산농악·날뫼북춤보존회에서는 2003년부터 북비산네거리 원고개시장 입구에서 ‘달구벌 목민관 추원제’를 열고 목민관의 넋을 기리고 있다.

북비산네거리 원고개시장 입구는 서구에서 교통량과 유동인구가 가장 많은 곳이다. 이른 새벽엔 인력시장, 낮엔 노인들의 쉼터로 늘 사람이 북적인다. 그래서 각종 선거 때마다 출마자들이 줄지어 이곳을 찾아 유세를 벌인다. 인근 달성공원~북비산네거리로 이어지는 인동촌시장은 20년 전부터 아나고(붕장어)를 판매하는 식당이 들어서면서 ‘아나고골목’으로 유명해졌다. 현재 150m 거리에 20여개의 음식점이 운영되고 있다.

“비산4동 고려장고개의 무덤은 ‘삼국시대 고분군’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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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장고개는 옛 삼국시대 비산동고분군 일대로 현재 대성초 등(왼쪽 아래)과 제일고(오른쪽) 일대다.(네이버 항공지도)


▲고려장고개= 서구 비산4동에 위치한 고개로 ‘고려장만데이(산마루)’라고도 한다. 대구지명유래총람에 따르면 비산4동 제일고(옛 경상여상)앞 언덕에 고려장을 한 무덤이 많아 고려장고개로 불렸다고 한다. 현 국채보상로 88길 35의 6 일대라는 설이 있다. 고려장은 이곳에 있던 수십 기의 삼국시대 비산동고분군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일제는 1920년 달성공원 남쪽 현 대성초등과 제일고 인근에 있던 고분군의 흙더미로 천왕당지(남소)를 메워 대구장을 현재의 서문시장으로 옮겼다. 대구지명유래총람에 소개된 주민의 증언은 이런 사실을 뒷받침한다.

“농짝(장롱 문짝)만한 돌을 세워 놓았는데 그거 싹 뜯어뿌고 빌라 지었다. 그리고 돌띠도 깨가고 그랬다. 거 있는 물건 다 보물아이가. 일제 때 왜놈들이 그거 가지갈라꼬 쇠작때기로 쑥쑥 쑤셔서 다 파갔지.”



◆달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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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고개는 고개가 파도처럼 물결친다고 해 생긴 이름이다.


▲파도고개= 달구벌대로 지하철2호선 내당역에서 달서구 성당시장네거리 사이 왕복2차로의 고갯길이다. 고개가 파도처럼 물결친다고 해 파도고개라 불린다. 파도고개는 크게 3고개로 나뉘는데 두류산을 절개해 도로를 만들고 주택단지를 조성해 생겨났다. 파도고개를 끼고 성남초등학교가 있다.



◆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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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살고개는 80년대 경북대 학생들이 북문 언덕으로 거리시위 를 벌이다 전경의 최루탄과 지랄탄에 ‘작살’이 난 곳이기도 하다.

▲작살고개= 옛 배자못 부근에 살던 한 장수가 역모를 품고 대구 관아를 치기 위해 진격하다 경북대 북문~정문 고갯마루에서 관군에게 패해 ‘작살’이 났다고 ‘작살고개’ 또는 ‘작미(作米)고개’로 불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경북대체육관~경북도청 고갯길이라는 설과 경북대정문 부근 고갯길이라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앞의 고갯길은 2개의 구릉으로 돼 있는데 하나는 도청 부근 언덕으로 이어지고, 다른 고개는 경북대 북문 원룸 밀집촌으로 연결된다. 짐승과 도둑이 자주 출몰해 혼자 넘다가는 작살이 난다고 해서 작살고개라고도 불렸다는 설도 있다.

김광순 택민국학원장은 “복현 언덕은 옛날 공동묘지로 인골이 나오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작살고개는 80년대 민주화운동 시위과정에서 경북대 학생들이 북문 언덕으로 진출하다 전경의 최루탄과 지랄탄에 작살이 났던 곳이기도 하다.

▲솥고개= 옛 대구군과 팔거현(칠곡)의 경계다. 솥같이 생긴 산으로 둘러싸였다고 해 솥고개 또는 솥재라 불렸으며, 옛 지도에는 정현(鼎峴)으로 나와있다. 부근에 위·아래솟골 마을이 있다. 지금의 북구 국우동~무태 고개다. 솥고개는 98년 민간투자 사업으로 준공한 국우터널로 재의 기능은 상실됐다. 국우터널은 2012년 7월까지 유료도로로 운영했다.



◆수성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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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수성구의회가 고모령 들머리에 ‘비 내리는 고모령’노 래비를 세웠다.

▲고모령= 1948년 발표된 현인의 노래 ‘비 내리는 고모령’으로 대구의 고개 가운데 전국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고개다. 고모령(顧母嶺)에 대한 유래는 두 가지 설(說)이 있다.

첫째 설을 살펴보자. 이곳에 홀어머니와 장군남매가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하루는 스님이 지나가다 집이 가난한 이유가 ‘덕을 쌓지 않아서 그러하다’면서 ‘산을 쌓으라’고 했다. 셋은 흙으로 산을 쌓았는데 남매가 서로 높이 쌓기 위해 싸웠다고 한다. 이 모습에 실망한 어머니가 자식을 잘못 키웠다는 자책으로 가출하면서 집을 뒤돌아봤다고 해서 ‘고모(顧母)’라 했다는 설이다. 어머니와 남매가 쌓은 산이 인근에 있는 모봉·형봉·제봉이다.

둘째 설은 다음과 같다. 일제강점기 징병이나 징용을 가는 젊은이를 태운 열차가 고개를 넘는데, 고개가 높아서 열차가 천천히 갔다고 한다. 이때 징병 가는 아들의 얼굴을 조금이라도 더 보기 위해 어머니들이 모여 일대가 북적였다고 해서 고모라 했다는 설이 전해온다. 지금도 경부선 철길과 옛 고모역이 인근에 있다. 이 고개는 수성구 만촌동 인터불고호텔~팔현마을 길이다.

91년 수성구의회가 고모령 들머리에 ‘비 내리는 고모령’이란 노래비를 세웠다. 최근 비석 옆에 노래듣기 버튼시설을 설치했으나 고장이 나 있다. 91년 가을비가 내리던 날 한국일보 사진부 김문호 기자(당시 29세)가 ‘비 내리는 고모령’을 취재하다 열차에 받혀 순직했다. 고인의 불망비가 노래비 뒤에 있다. 81년 고모령 부근에서 대형열차사고가 나 50여명이 숨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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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티는 대동여지도에 대장현(大墻峴)으로 나와 있다.

▲담티= 담티는 원현(垣峴), 즉 우리말로 담고개라는 뜻이다. 현재 달구벌대로 대륜중·고~5군수지원사령부 고갯길이다. 대동여지도(1861)에 대구~경산 고개가 마치 담장처럼 높다고 해 대장현(大墻峴)으로 나와 있다.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담을 틔우듯이 산을 뚫었다는 내용은 오류다. 지난해 11월23일자 위클리포유 대구지오에 대구지하철 2호선 담티역 안내문의 설명이 잘못 됐다고 지적했지만 지금껏 수정하지 않고 있다. 두사충이 말년에 명당자리를 구하러 다니다 지금의 담티 부근에서 담(痰)이 끓어 숨을 거뒀다는 내용도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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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정고개는 달구벌대로 월드컵삼거리 북편 구릉이다.

▲솔정고개= 달구벌대로 월드컵삼거리 북편 구릉을 말한다. 담티를 지나 솔정고개를 넘으면 시지인데 옛날 고갯마루에 당나무와 당집이 있었으며, 소나무가 우거진 가운데 정자가 한 채 있었다고 해 ‘송정현(松亭峴)’이라고도 불렸다. 솔정고개 남쪽에는 2015년 말 준공예정인 대구야구장 건축이 한창 진행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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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호고개는 청호서원에서 유래됐다.

▲청호고개= 수성구 범물동 관계삼거리~황금고가교 구간 내 지산삼거리~우방신천지타운 부근 고갯길이다. 청호고개가 있는 청호로라는 명칭은 2010년 3월에 지었다. 황금1동에 위치한 청호서원의 명칭을 반영했다. 청호서원은 임진왜란 당시 대구 의병장 모당 손처눌과 그의 6대조 격재 손조서 등을 배향한 서원이다. 청호로는 무학산(해발 225m)을 틔워 낸 길로 황금동과 지산·범물지구를 잇는 지름길이다.

▲쉬일목= 동부정류장~대구MBC 간 처음 나타나는 고개로 첫 고개에 서낭(돌을 쌓아서 비는 돌무지)이 있었다. 나무가 우거져 나그네가 쉬어가는 곳이라는 뜻으로 불렸다.

 

◆동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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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재는 고려 태조 왕건이 지났던 고개다.

▲대왕재= 대구시 동구 덕곡리와 칠곡군 동명면 남원리를 가르는 경계다. 대왕(大王)재는 고려태조 왕건과 관련이 깊다. 왕건이 후백제 견훤의 군대와 싸우기 위해 대왕재를 거쳐 동수(동화사)로 갔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왕건에 앞서 견훤을 치러 갔다 견훤에 패한 고려 공훤의 군사가 왕건을 기다려 대왕(待王)재라 했다는 설도 있다. 인근 도덕산 맞은편에 왕건바위로 알려진 대왕암과 송광매기념관이 있다. 고갯마루에는 현재 대왕재주유소가 있다. 인근 칠곡군 동명면 기성리~군위군 부계면 창평리를 뚫는 한티터널 공사가 2015년말에 완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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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고개는 동구 아양로 큰고개오거리~파티마삼거리 구간이다.

▲큰고개= 동구 아양로 큰고개오거리~파티마삼거리 구간이다. 고개가 높고 꼬불꼬불해 ‘큰고개’라 불렸다. 동구청~아양초등 구간은 ‘작은고개’라 했다. 이 고개는 금호강 건너 옛 공산면 주민들이 땔감을 팔러 다닌 길이었으며, 일제강점기 목탄차도 이 고개를 넘다 엔진이 자주 꺼지곤 했다. 옛날에는 차 2대가 겨우 지나는 길이었으나 지금은 왕복6차로다. 6·25전쟁 중 신천 부근에 있던 피란민을 동대구역 북동쪽 1㎞ 지점 새마을로 이주시켰는데 현 큰고개오거리를 새마을오거리로 부르기도 한다. 인근에 지하철 1호선 큰고개역이 있다.

내동재 오르면 서거정의 10景 버금가는 공령월출  감상

▲내동재= 내동은 동구 미대동 속 골짜기에 있는 동네다. 대구부 해북촌면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으로 옥정동과 함께 달성군 공산면에 편입됐다. 내동재는 팔공로 파군재삼거리~미대동 고갯길로 공산터널 부근이다. 터널이 뚫리기 전까지 남쪽 2차로 고갯길을 이용했다. 이 고갯길은 영남일보가 매년 가을 주최하는 팔공산달빛걷기대회의 도보 구간이기도 하다. 70년대 말에 건설했으며 이때부터 내동재로 불렸다. 그 전엔 산이었다.

김광순 택민국학원장은 “지묘동에서 내동으로 가는 길은 현 팔공로 왼편 골짜기 문암천(동화천 상류) 가장자리에 난 도로를 이용했다. 이 길로 버스도 다녔다. 지묘동~내동 경계에 문바위(門岩)라는 커다란 바위가 2개 있었는데 관문역할을 했다”고 회상했다.

문암천 옆에 ‘첨모재(瞻慕齋)’라는 재실이 있어 ‘재’라는 우리말과 헷갈려 내동재를 첨모재로 오인하는 사람도 많다. 옛 도로 고갯마루에 올라 달을 보면 서거정의 대구10경 중 제9경 ‘공령적설(公嶺積雪)’의 아름다움에 버금가는 ‘공령월출(公嶺月出)’을 감상할 수 있다. 내동재를 ‘달빛재’라고 하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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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성재는 지세가 마치 성(城)처럼 생겼다고 해 불린 이름이다.

▲능성재= 대구시 동구 능성동과 경산시 와촌면 음양리 경계에 있는 고개다. 지세가 마치 성(城)처럼 생겼다고 해서 능성재라고 불렸다. 육군 제50사단 예비군훈련교장이 인근에 있다. 고갯마루에는 ‘능성동 지경마을’이란 입석이 있다. 주위에 속골·성두뜰·안양배이 같은 자연부락이 흩어져 있다.

 

◆달성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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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조령 옛 2차로 고갯마루. 휴일엔 산악바이크 마니아가 많이 찾는다.

▲팔조령= 팔조령(八助嶺)은 비슬산지맥인 상원산과 삼성산 사이에 있는 재다. 봄이면 주변에 진달래가 만발하고 고갯마루에서 바라보는 청도 쪽 일출이 장관이다.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과 청도군 이서면을 잇는 고개로, 산적과 짐승이 자주 출몰해 8명이 한조가 돼야 넘어갈 수 있다고 해서 팔조령으로 불렸다. 조선시대에는 영남대로의 주요 길목으로 문경새재 다음으로 가장 높았다. 현재 두개의 터널이 개통돼 옛 고갯길은 등산로나 드라이브코스로 애용되고 있다. 특히 헐티~팔조령 능선 길(19㎞)과 팔조령~용지봉이 등산객에게 인기다.

옛 고갯마루에서 25년째 팔조령산장휴게소를 경영하는 이종진씨는 “이의근 전 경북도지사가 퇴임해 대신대 총장을 할 당시 휴게소에 자주 들러 내가 도지사 시절 터널을 뚫어 장사가 잘 안됐을 것”이라며 미안해했다고 귀띔했다. 이 전 도지사는 청도군 이서면 대곡리 출신이다.

이씨는 “50년대 이 도지사가 대구상고(현 상원고)에 다닐 때 짚신을 신은 채 쌀 한가마니를 지고 팔조령을 넘었다고 했다”면서 “요즘은 주말에 산악자전거 마니아가 많이 찾는다”고 했다. 그는 “옛 아스팔트 길 옆에 인도를 만들어 산책코스로 활용하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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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티는 고개가 높아 헐떡거린다고 해 붙인 이름이다.

▲헐티= 비슬산과 우미산 사이 낮은 부분으로, 달성군 가창면과 청도군 각북면의 경계다. 헐티(해발 525m)의 유래는 고개가 크고 높아 헐떡거리며 고갯마루에 올라서면 허기가 진다고 해서 붙인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고갯마루에는 20년째 동동주와 국수를 파는 주막이 있다. 가창댐에서 헐티로를 따라 최정산의 너덜과 가창댐 수변풍광을 보며 가는 길이 무척이나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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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내미재는 달성군 화원읍 명곡리~반송리로 가는 기남로의 고갯길이다.

▲기내미재= 달성군 화원읍 명곡리에서 용연사가 있는 반송리로 가는 기남로의 고갯길이다. 고개 중간에 기남지가 있어 쉼터로 많이 이용한다. 기남로는 달성공단과 대구를 연결하는 주요 도로다. 기내미재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용문산과 닭지만당봉이 나오고, 서쪽으로 향하면 함박산이 나온다.

기내미재는 대구수목원에서 출발하는 달성보 녹색길 구간에 있다. 기내미재 전망대에선 금계산, 달성보 등이 훤히 보인다. 기내미는 ‘귀넘이’ 또는 ‘귀네미’에서 유래한다. 북한산에도, 강원도 황장산에도 귀네미재(牛耳嶺)가 있다.

이곳 또한 귀넘이가 ‘기내미’로 변음됐을 가능성이 크다. 토정 이지함은 정감록에 귀네미가 무릉도원으로 가는 길목이라고 적었다.
글·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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