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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스토리텔링 2014-구미] 낙동강 물길따라<9> 오로里와 ‘장인 김성미·사위 이맹전’의 충절

2014-08-18

단종 폐위되자 벼슬 내던지고 귀향 “난 이곳에서 늙어죽으리”

20140818
직제학을 지낸 김성미가 사위 이맹전과 함께 낙향해 머물렀던 구미시 고아읍 오로리 전경. 김성미는 단종에 대한 일편단심으로 다시 출사하지 않고 “나는 이곳에서 늙는다” 하여 마을 이름이‘오로(吾老)’로 불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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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리 마을 끝자락에 위치한 가좌골. 김성미는 가좌골에 오로재를 짓고 후학을 양성하며 여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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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이곳에서 늙어죽으리

오로리는 구미시 고아읍에 있다. 고아읍은 구미시의 남서부에 위치, 면적이 63.82㎢, 인구 3만여명이다. 소재지는 관심리였으나 2006년 문성리로 바뀌었다. 본래 선산군 지역으로 망장면(網障面)이라 하여 예곡·강정·관심·신화·오로 등 23개 이(里)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평성면의 항곡·모하·봉계·송림·다식 등 18개 이(里)와 내서면의 봉산리를 병합해 옛 고아부곡(高牙部曲)의 이름을 따서 고아면이 되었으며, 1997년 읍으로 승격되었다.

남쪽에는 다봉산·꺼먼재산·국사봉을 잇는 산지가 면계를 이룬다. 그 북사면에 해당하는 구릉지가 전 면에 분산·분포해, 봉화산·접성산·백마산 등이 솟아 있다. 북쪽 경계를 따라서는 감천이, 동쪽 경계를 따라서는 낙동강이 흐른다. 그 연안에 넓은 충적평야를 형성하고 있다. 낙동강·감천과 연접해 지질은 대개 사질토양으로 경지율이 비교적 높고, 수리시설이 양호해 군의 곡창을 이룬다.

오로리의 옛 지명은 올고개, 오을고개(五乙古介), 또는 오로촌(五老村)이다.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영월로 귀양하는 것을 보고 직제학을 지낸 김성미는 사위 이맹전과 함께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서 단종을 사모하며 “나는 이곳에서 늙는다”는 말을 하여 ‘오로(吾老)’라 했다고 한다.

또한 이 마을에 황씨, 강씨, 심씨, 이씨 4성이 살았는데 세 성씨는 타지방으로 이주하고 강씨 문중의 강거민이 “나는 늙어 죽도록 이곳에서 살겠다”고 했다는 데서 ‘오로’란 이름이 붙었다고도 한다.

또는 태종 때 심온이 역적으로 몰려 죽자 그 아들 회가 유모에게 안겨 이곳 강거민의 삼밭까지 피신해온 것을 데려다 양자로 길렀는데, 후일 온의 결백이 밝혀져 회가 벼슬길에 올라 좌의정이 되었을 때 양부에게 벼슬길에 오르기를 권했으나, 양부는 사양하고 “나는 홀로 늙어가겠다”고 해서 ‘오로’라는 이름이 붙었다고도 한다.



#2. 장인과 사위의 삼엄한 충절

오로리에는 김성미와 이맹전의 애틋한 얘기가 전해온다.

김성미의 자는 옥여(玉汝), 호는 오로재(吾老齋)이다. 고려 우왕 4년(1378) 선산 영봉리(현 구미시 이문리)에서 출생, 조선 태종 때 문과에 등제됐다. 이문리는 생육신으로 단종에 대한 충절을 곧게 세운 하위지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김성미는 세종 때 많은 공적을 남겼으며, 이어서 문종과 단종 세 임금을 섬겨, 벼슬이 예문관 직제학 겸 군기관사에 올랐다. 그러나 단종이 위협에 못 이겨 세조에게 왕위를 물려줌을 보고는 사위인 이맹전과 함께 벼슬을 버리고 귀향, 이곳 오로리에서 늙어 죽었다.

이맹전은 조선시대의 학자이면서 문인이다. 세종대왕, 박팽년, 성삼문 등과 같이 훈민정음을 만든 이 가운데 한 명이다. 후에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자 목숨을 걸고 항거한 생육신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이맹전의 자는 백순(伯純), 호는 경은(耕隱)이다. 대대로 성주 북면 명곡촌에서 살다가 그의 선친인 판서 이심지 때부터 선산 남면 형곡촌으로 이사했다. 세종 9년(1427)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이 되었다가 사간원 좌정언, 지제교, 소격서령을 거쳐 거창현감으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당시 상황을 살펴보고 장차 단종에게 화가 미칠 것을 예견하고 벼슬을 버리고 장인인 직제학 김성미가 사는 선산 망장촌(網障村·지금의 오로리)에 은거하였다.



#3. 매일 단종 있는 곳 향해 절해

김성미와 사위 이맹전이 오로리에 들어오자 인근 학자들의 발길이 잦아졌다. 자연스럽게 출사 얘기가 나오고, 세상이 바뀌었으니 새롭게 시작하자는 권유도 잇따랐다. 그러나 김성미는 그런 소리에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는 이곳에서 늙어 죽으리라.”

그는 그런 뜻으로 마을 이름을 오로촌으로 하고, 그의 호도 오로재로 했다. 자신의 뜻이 완강함을 그렇게 드러내 보인 것이다. 그는 오직 한 임금을 섬기는 일에 성심을 다했다. 매일 단종을 그려 뒷산에 올라 단종이 있는 곳을 향해 절을 했다. 하루도 거르지 않아, 마을 사람들은 김성미가 절을 한 그 골짜기를 직학곡(直學谷)이라 할 정도였다.

이후 김성미는 오로리 마을 끝자락에 있는 가좌(佳座)골에 들어가 오로재를 짓고 후학을 양성했다. 당시 그의 제자가 되기 위해 선비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는데, 제자들은 가좌골 오로재를 가리켜 “즐거움을 더해 주는 영광스러운 자리”라고 말했다고 한다.

김성미가 오로재를 짓고 후학을 양성했던 가좌골은 임진왜란 전까지는 큰 규모의 마을이었지만, 현재는 2~3가구만 남아있다. 매방골이라고도 하고, 응방곡(鷹放谷)으로 불리기도 한다.

김성미의 사위 이맹전의 충절도 이에 못지않았다. 아니 더욱 철저했다.

그는 자신의 명성을 듣고 찾아오는 이들의 말이 너무나 세속적인 이익에 치우쳐 있는 게 맘에 들지 않았다. 자신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곧 벼슬길에 나설 것이라고 떠들어대는 소리도 듣기 싫었다.

어느 날 또 또래의 선비들이 찾아왔다. 그러나 그는 방 안에 앉아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보게, 백순. 우리가 왔네.”

큰 소리로 그를 불러도 그는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선비들은 성큼 방으로 들었으나 그는 여전히 미동도 않고 한 곳만 멍하니 쳐다볼 뿐이었다.

“이보게. 왜 이리 정신을 놓고 있는가?”

한 선비가 그의 어깨를 쳤다. 그는 움찔 했으나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는 듯했다. 선비들이 그제서야 그의 얼굴을 살피고, 눈앞에 손을 흔들어보지만, 그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표정이었다.

“어허, 이런 변고가? 이 사람이 눈이 멀고, 귀가 먹지 않았나.”

선비들은 크게 떠들어대면서 탄식을 하다가 돌아갔다. 그러자 그는 비로소 슬그머니 문을 닫고는 책상 앞에 앉아 눈으로 책을 읽었다.

눈 멀고 귀 먹은 행세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수차 그런 일이 반복되자 인근에 빠르게 소문이 퍼져나갔다. 그를 아는 친지와 선비가 줄줄이 찾아오는 등 법석을 떨었다. 그리하여 단종에 대한 충성이 너무나 커서 단종이 쫓겨나자 그 슬픔의 충격으로 몸에 이상이 온 것이란 동정론도 나왔다. 차츰 그가 눈 멀고 귀 먹었다는 게 사실로 받아들여지면서 선비들도 발을 끊었다. 이맹전의 그런 돌연한 태도에 자제들이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 왜 청맹과니에 귀머거리 행세를 하시는 겁니까.”

“수양하는 데 세속의 사람들이 드나드는 걸 꺼리기 때문이다.”

그의 청맹과니와 귀머거리 행세는 워낙 용의주도하고 완벽해서 자제들 외에는 집안 여자들도 실제 그가 눈멀고 귀 먼 줄 알 정도였다.

그런 가운데 매달 초하룻날이면 아침 해를 향해 절을 올렸다. 이는 곧 단종이 있는 곳을 향한 예배였다. 그러나 집안 식구들 대부분이 그 이유를 알 턱이 없었다.

“아버지, 어디를 향해 절을 하시는 겁니까?”라는 물음에 그는 다만 “나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기도한다”고 할 뿐이었다. 또한 스스로 시를 지어 읊기도 했다.

‘눈과 귀 모두 다 어둡고 막히어서 견문 없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싶네(眼欲昏昏耳欲聾 見聞無敏與癡同).’

이런 그의 철저한 속임수 행세에 집안 여자들도 정말로 그가 눈이 멀고 귀가 멀었다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런 그도 예외를 두고 마음을 연 사람이 있었다. 김숙자와 평생 동안 도의(道義)의 벗으로 지냈으며, 김종직과도 역시 그러했다.

김종직이 그가 눈이 멀고 귀가 들리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놀라 그를 찾았을 때였다. 마침 둘 외에는 아무도 주위에 없자 그가 문득 말문을 열었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얘기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김종직이 이상해하면서 “우리 선생의 병환이 이제 나은 것 같습니다”라고 아주 기쁜 낯빛을 했다. 이에 이맹전은 목소리를 낮추며 은근히 말했다.

“병이 나은 것이 아니네. 초야에서 곧 죽을 뻔하다가 그대 같은 참된 군자를 보고 나니, 나도 모르게 가슴이 시원스럽게 툭 트여서 그런 것이네.”

김종직은 그의 숨은 깊은 뜻을 그제야 안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정색을 하면서 그에게 존경의 뜻을 표했다. 이후 그들은 자주 만났다. 김종직은 언제나 혼자 찾아와서 두 사람 만의 밀담을 즐겼다. 서로 마음을 토로하고 술잔을 주고받으며 시간 가는 줄을 모를 정도였다. 이맹전의 부인 김씨는 두 사람의 수상한 밀담에 의심이 부쩍 들었다.

“저 양반이 정말 눈이 멀고, 귀가 들리지 않는 걸까?”

그는 남편을 찬찬히 살폈다. 그리하여 그가 진짜로 눈 멀고 귀 먹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아무에게도 그러한 사실을 알리지 않은 채 그의 눈이 안 보이고 귀가 들리지 않는 것이 사실이려니 덮어두었다. 그가 대청에 있을 때 그 앞에다 곡식을 햇볕에 말리자 닭이나 참새들이 날아와 마구 쪼아먹어도 그냥 내버려두었다.

훗날 점필재가 ‘이준록(彛尊錄)’에 그가 왜 청맹과니에 귀머거리 행세를 한 것인지를 곡진하게 기록하여 비로소 그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맹전은 그런 상태로 부인 김씨와 90세까지 해로하였는데 워낙 청빈해서 집안에는 한 끼의 양식도 비축된 것이 없었다고 적고 있다.

이런 궁핍한 지경에 언젠가 어떤 후생(後生)이 물었다. “선생께서 초야에 묻히신 백년 동안에 집안의 사면 벽만 남을 것이니, 자손의 걱정거리가 될까 염려됩니다.” 이에 이맹전은 대답했다. “가난으로 가업을 전하면 무슨 걱정거리가 있겠는가?”

그의 묘소는 구미시 해평면 금호리 미석산 재궁동에 있다.

김성미와 이맹전처럼 장인과 사위가 똑같이 한 동네서 부귀와 영화를 모두 버린 채 오로지 선비의 기풍을 삼엄하게 세우고, 충절의 기상을 드높인 일은 고금에 없던 일로 꼽힌다. 

 

글=이하석 <시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공동기획 : 구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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