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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스토리텔링 2015] 김천 고대국가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5> 400여년 흥망의 역사

2015-06-03

남부 토착세력들, 북방유민과 나라 세우고 신라에 무너졌다

<스토리 브리핑>

김천지역의 읍락국가(邑落國家) 감문국(甘文國)의 건국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김천의 토착세력과 북방세력의 만남으로 감문국이 세워졌다 추정할 뿐이다.

 

2천년을 넘나드는 세월의 무게는 감문국에 대한 기억조차 희미하게 만들었다. 다만 감문국의 건국 시기는 기원전 2~3세기 경으로 추정되는데, 국가의 지속시기는 400년 남짓으로 보고 있다. 

 

1천700여년 전 신라에 복속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비록 소국(小國)의 역사는 승자인 신라의 역사에 의해 가려졌지만, 감문국에 대한 자부심은 김천시민의 마음 속에 여전히 남아 있다.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 5편은 감문국의 건국과 패망에 관한 이야기다.

[스토리텔링 2015] 김천 고대국가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 400여년 흥망의 역사
추풍령을 지나는 경부고속도로 상하행선 구간 양쪽에 추풍령휴게소가 자리 잡고 있다. 추풍령은 예로부터 백두대간을 넘나드는 유용한 교통로로 삼한시대 각 세력의 각축장이었다. 신라는 추풍령 일대를 다스리던 감문국을 정복하면서 금강유역 및 서해안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었다. <김천시 제공>
[스토리텔링 2015] 김천 고대국가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 400여년 흥망의 역사
계명대 행소박물관에 김천시 구성면 송죽리 선사유적에서 출토된 토기가 전시돼 있다. 이러한 유물은 김천의 독자 세력이 선사시대부터 감천변에 자리잡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영남일보 DB>

# 감문국의 건국

안타깝게도 확인된 감문국의 건국 역사는 거의 전무(全無)하다. 심지어 전설로도 남아있지 않다. 2천여년의 시간은 감문국 기원의 비밀을 남기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사학계와 향토사학계 역시 감문국의 건국 시기와 그 내용에 대해 추정할 뿐 구체적 기록을 발견하지 못했다. 단 감문국의 건국 시기는 대략 기원전 2~3세기 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당시 낙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수많은 읍락국가가 형성되기 시작했으며, 감문국도 그중 하나였다는 것이다.

향토사학계는 북방세력이 남하해 기존 토착민과 결합하면서, 감문국과 같은 읍락국가가 형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문재원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은 “기원전 위만조선(衛滿朝鮮)이 중국 한(漢)나라에 의해 망하고 유민들이 한반도로 유입되면서 북방의 선진문물도 함께 전해졌을 것”이라며 감문국의 건국 배경을 유추했다.

고려시대 유학자이자 역사학자인 김부식(金富軾)이 쓴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위만조선의 유민으로 보이는 북방세력에 관한 언급이 있다. 삼국사기 제1권 신라본기(新羅本紀)에서는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를 이야기하면서 “朝鮮遺民 分居山谷之間 爲六村(조선유민이 산골에서 6개의 마을을 이루고 살고 있다)”고 기록했으며, 이 마을들을 진한(辰韓) 6부라고 했다. 북방에서 유입된 유민의 존재가 삼한지역 각 읍락국가의 형성에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북방의 문화를 받아들였지만, 기존 토착세력의 영향력 또한 만만치 않았다는 의견이 있다.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은 “북방유민의 일방적 지배가 아닌 토착민들과의 결속으로 읍락국가의 형성을 가속화시켰다고 본다. 개령·감문면 일대에서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 무덤 양식인 지석묘(고인돌)가 대거 발견된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고 주장했다. 지석묘는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를 상징하는 무덤으로 거대한 바위로 만들어졌다. 현재 김천시 감문면 문무·삼성·송북리 등지에 산재해 있다.

김천시 구성면 송죽리에서 발견된 대규모의 신석기·청동기 유적 또한 김천에 독자적 토착세력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1992~93년, 계명대는 송죽리에서 대규모 선사유적을 발굴했다. 당시 발굴에 나섰던 배성혁 대동문화재연구원 실장은 “일찍이 김천지역의 토착세력은 감천을 중심으로 거점취락을 형성하고, 낙동강 일대와 백두대간을 넘어 금강 상류의 세력과도 긴밀한 교류를 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토착민 집단과 북방세력이 결합해 감문국을 건국했다고 볼 수 있다. 감천 유역의 집단은 북방민의 문물을 접한 것을 계기로 독자적 세력을 형성해 영역을 넓혀가기 시작했다. 그 결과 김천시 개령면 일대의 비옥한 토지를 기반으로 감문국을 건국할 수 있었다.

감문국의 중심인 개령면 일원은 방어에도 유리했다. 산성(山城)을 거점으로 군사활동을 펼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김천시 일원에는 감문면의 속문산성과 고소산성, 개령면의 감문산성 등 감문국과 관련된 산성지를 포함해 9곳의 산성지가 있다. 결론적으로 백두대간 아래의 들과 물길을 삶의 터전으로 삼은 정치세력은 생산과 방어에 유리한 감천변을 거점으로 정했다. 이어 인근 읍락을 통합해 한 국가를 건설했다. 그 국가가 바로 감문국이었다.


삼국사기 “위만조선 유민, 진한 6부 이뤄”
三韓 읍락국가형성에 북방세력 관련 방증

개령·감문·구성면 일대 선사시대 유적은
감문국 이전 토착세력의 영향력 존재 입증

서해·전라도·북방 향하는 길목 추풍령은
영토확장 지리적 요충지…각 세력 각축장
결국 신라 왕의 아들 석우로가 정복‘대단원’

 

 


# 감문국의 멸망

역사는 감문국이 231년(조분왕 2) 신라 이찬 석우로(昔于老)에 의해 멸망했다고 기록한다. 삼국사기에는 “신라조(新羅條) 조분이사금(助賁尼師今) 2년 7월조에 신라가 이찬 석우로를 대장군으로 삼아 감문국을 토멸하고 그곳을 감문군으로 삼았다”고 적혀 있다. 신라의 열째 임금 내해왕(奈解王)의 아들이자 주변세력 정복에 잔뼈가 굵은 석우로를 직접 보냈을 정도로 감문국은 신라에 중요한 지역이었다.

감문국이 무너지던 시기, 신라는 이미 경상도 지역의 읍락국가 상당수를 정복한 상태였다. 신라는 일찍이 경산의 압독국(押督國), 경주 안강의 음즙벌국(音汁伐國)을 손에 넣었으며, 벌휴왕 때는 의성 조문국(召文國)을 병합했다. 남은 나라로는 김천 감문국과 상주의 사벌국(沙伐國), 영천의 골벌국(骨伐國) 정도였다.

당시 신라는 나라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 영역을 넓혀 나가는 부단한 노력을 했다. 감문국을 비롯한 백두대간 주변은 물론 경상도 일원의 소국을 병합해 세력을 넓혀나갔다. 특히 감문국은 신라가 꼭 정복해야 할 지리적 요충지였다. 감문국은 한반도 남부의 중심에 위치해 있으며, 고구려·백제·신라와 가야 세력이 동시에 접하는 장소였다.

특히 감문국의 영역이었던 추풍령은 신라가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하는 요충지였다. 백두대간에서 수레가 다닐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고개인 추풍령을 점령해야 백두대간의 진출입로를 확보할 수 있었다. 신라는 추풍령을 손에 넣어야만 금강유역으로 나아갈 수 있었으며, 서해안과 북방은 물론 전라도로 향하는 길을 열 수 있었다. 또한 감문국을 차지해야 가야 공략을 위한 전초기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신라가 감문국을 정벌하려는 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사벌국과 대가야 사이에 위치한 감문국을 정벌해야 두 세력 간의 교류를 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사벌국은 영남지역 서북부의 맹주였다. 상주의 넓은 들을 기반으로 큰 세력을 형성했다. 대가야와 연맹체를 맺지는 않았지만 신라와 가야 사이에서 밀고당기는 정책을 펼치며 독자 생존을 도모했다.

결국 신라의 감문국 정벌은 새로운 교통로를 확보하고 대가야와 상주 사벌국을 분리하기 위한 사전작업이었다. 실제로 감문국이 신라에 정복당하고 감문군이 설치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벌국은 신라에 병합되는 운명을 맞이한다.

감문국의 멸망은 경북지역의 읍락국가가 멸망하는 연쇄효과도 일으켰다. 신라의 입장에서 골칫거리였던 영천의 골벌국이 감문국 멸망 이후 신라에 투항한 것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236년(조분왕 7), 골벌국 왕 아음부(阿音夫)는 무리를 이끌고 신라에 항복했다. 신라의 도읍인 서라벌(경주)의 턱밑에 골벌국이 위치해 있었기에 신라는 늘 껄끄러운 입장이었다. 그러나 김천 감문국과 상주 사벌국까지 신라에 병합당한 마당에 골벌국의 세력은 극도의 위기감을 느꼈을 것이다. 결국 골벌국의 지배세력은 신라와의 병합을 택한 후 서라벌에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데 만족했다.

감문국 정벌을 신호탄으로 경상도 일대의 소국 대부분이 신라에 편입되었다. 이로 인해 신라는 중앙집권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었다. 고구려, 백제와 나란히 어깨를 겨룰 수 있는 도약의 기틀 또한 마련할 수 있었다.

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참고문헌 =‘유적으로 고찰한 감문국’ ‘(진·변한사 연구)진·변한의 성립과 전개’ ‘계명사학 제23집’ ‘국역 김천역사지리서’ ‘디지털김천문화대전’ ‘대구·경북 신석기 문화 그 시작과 끝’
▨ 자문단 △문재원 국사편찬위원회 김천사료조사위원 △이석호 김천향토사학회 회장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주보돈 경북대 사학과 교수
공동기획: 김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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