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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디아스포라 .1] 돌아오지 못한 사람...사할린으로 끌려갔던 조선인과 후손 3만여명, 아직도 그곳에…

2015-08-21
20150821
러시아 유즈노사할린스크 중심에 있는 ‘승리의 광장’에서 지난 16일 풍악대의 공연이 펼쳐지고 있다.
20150821
유즈노사할린스크 스탈리차 체육관에서 지난 16일 열린 광복 70주년 기념 축하 공연에 참석한 한인들이 러시아 국기와 태극기를 흔들며 즐거워하고 있다.

집.에.가.자.

1945년 8월15일 중국 충칭의 임시정부. 일본의 항복 선언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소리 맞춰 구호를 외친다. 집에 가자! 집에 가자! 집에 가자!

최근 개봉한 영화 ‘암살’의 한 장면이다. 그들이 광복의 기쁨에 환호하며 외친 말은 ‘대한독립만세’가 아니라, ‘집에 가자’였다.

“만주에서 우리는 지붕이 무너져도 고치지 않았어. 왜 그런지 알아? 곧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야.”

이청천 독립군 부대 저격수인 ‘암살’의 여주인공 안옥윤의 말이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갈 날만 손꼽아 기다리던 그들은 어떻게 되었던가. 꿈에서도 잊지 못하던 고향으로 돌아갔던가.

집에 간다고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던 그날로부터 무려 70년. 여전히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사할린, 그곳에만 아직도 3만여명이 ‘남아’ 있다. 국가란 무엇인가. 그들의 물음에 우리는 답해야 한다.

◆ 누구도, 무엇도 잊지 않겠다

지난 16일 오전 10시 . 광복 70주년을 맞은 러시아 유즈노사할린스크의 이날 하루는 아주 특별하게 시작됐다.

브이코프, 홈스크, 우글레고르스크, 코르사코프 등 사할린 전역에서 살고 있는 한인들이 유즈노사할린스크 중심에 있는 ‘승리의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제 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 독일에 대한 연합군의 승리를 기념하는 러시아의 전승기념 광장이다. 정장을 곱게 차려 입은 한인들의 헌화와 참배가 길게 이어졌고, 사물놀이와 풍악대의 화려한 공연도 펼쳐졌다.

행사 참석자들은 30여분간 놀이패를 따라 거리행진을 했다. 휴일을 맞아 느긋한 아침을 보내던 러시아인들이 요란한 풍악소리를 듣고 거리로 몰려들었다.


日 강제연행으로 7만여명 징용
전쟁 끝났지만 협정으로 발묶여
한-소 수교때까지 45년간 잊혀져

귀환 못하고 살아가는 한인들
사할린 최대 소수민족으로 정착
해마다 광복절때 한자리 모여
풍악 울리고 한국음식 함께 나눠


임용군 사할린주 한인회장은 “광복절이 원래 15일이지만, 러시아 한인들은 양력 8월15일을 추석 명절로 쇠고 있어서 행사를 하루 늦췄다”면서 “해마다 맞는 광복절이지만 70년이 되는 올해의 의미는 더욱 특별하고 행사도 예년보다 신경을 써서 준비했다”고 말했다. 올레그코제먀코 사할린 주지사, 블라디미르 박 사할린 네벨스크시 시장 등도 행사에 참석했다. 인구 50만여명의 사할린에서 한인은 최대의 소수민족이다.

40여분간에 걸친 거리 행진 끝에 행렬이 다다른 곳은 스탈리차 체육관. 1천여명의 한인이 참석한 가운데 음악공연, 장기자랑, 노래자랑 등이 오후 5시까지 이어졌다. 행사가 진행되는 체육관 옆 잔디밭에서 준비해 온 음식을 함께 풀어놓고 한바탕 질펀한 잔치판도 벌인다. 빈대떡과 인절미와 술떡, 김치와 깍두기, 집에서 담갔다는 막걸리가 한국식 그대로다. 70년을 잊지 않고 이 맛을 기억하고 지켜온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없이/ 아낌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 할 때/ 수백만송이 백만송이 백만송이 꽃은 피고/ 그립고 아름다운 내 별나라로 갈 수 있다네’.

고국에서 온 가수의 노래가 울려퍼지자 행사도 절정으로 치닫는다. 자리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흥에 겨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노래에 맞춰 태극기와 러시아 국기를 흔들며 덩실덩실 어깨춤을 춘다. 그러는 동안 그들은 잠시 이곳이 러시아라는 사실을 잊는듯 하다. 마치 그립고 아름다운 내 별나라 그 곳, 고향에라도 온 듯.

◆ 검은 대륙으로 끌려간 조선인

사할린의 일제 때 지명은 가라후토, 화태(樺太)다. 아이누어로 ‘자작나무의 섬’이란 뜻이다. 일본은 1905년 러일전쟁 승전의 대가로 북위 50도 이남, 사할린의 절반을 러시아로부터 할양받았다.

사할린은 일본의 군사요지였다. 이곳에 일본은 공군 비행장, 해군기지 등의 건설 공사를 대대적으로 추진했고 목재, 석탄 등을 일본으로 내보내는 보급기지로 삼았다. 본격화된 식민지 개발은 필연적으로 많은 노동력을 요구하였으며 그 대상은 조선인이었다.

‘자유모집’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됐지만 일본은 ‘조선인내지이입 알선요강’과 ‘국가총동원법’에 따라 ‘관알선’ ‘징용령’이라는 강제연행으로 무차별 차출에 나섰다. 그렇게 강제로 끌려온 조선인은 7만명을 넘었다. 1944년 8월 연합군의 제공권 장악으로 이곳에서 생산한 석탄을 일본으로 운반하기 어렵게 되자 이곳의 조선인 노동자를 다시 일본의 탄광으로 재징용하는 ‘이중징용’의 만행까지 저질렀다. 이른바 전환배치 혹은 이중징용의 희생자는 최소 3천여명에서 많게는 2만여명에 이른다.

1945년, 전쟁은 끝났고 사할린에 살고 있던 4만3천여명의 조선인은 드디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다고 기뻐했다. 하지만 1946년 12월9일 체결된 미소협정에 따라 귀환 대상자는 일본인 포로, 일반 일본인으로 한정됐다.

일본은 일본 호적을 기준으로 일본인만 받아들였고 당시 조선 호적으로 편제된 조선인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1946년 12월5일부터 49년 7월22일까지 총 29만2천590명의 일본인들이 일본땅으로 귀환했다. 1956년 10월19일 옛소련과 일본은 수교에 합의하는 공동선언을 발표했고 1957년 8월1일부터 59년 9월28일까지 잔류 일본인, 일본인과 결혼한 조선인, 그 가족의 귀환도 이루어져 1천541명의 조선인이 일본으로 송환됐다.

1990년 한국과 소련이 수교하기까지 45년간 4만여명의 강제동원된 조선인과 그 후손들은 사할린에 버려졌다. 세상은 그렇게 그들을 잊었다. 현재 사할린에는 한인 1세 600여명을 포함해 3만여명의 한인이 살고 있다.

글·사진=러시아 유즈노사할린스크에서 이은경기자 lek@yeongnam.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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