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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디아스포라 .5] ‘이산’의 역사가 시작된 곳

2015-09-18

하루, 이틀, 사흘…2만5550일이 지나도 오지 않는 ‘광복 귀국선’

20150918
맑은 날이면 멀리 홋카이도가 보이는 러시아 사할린 코르사코프 항구. 이곳에서 4만여 한인은 고국으로 돌아가는 배를 기다렸다. 작은 사진은 코르사코프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망향의 언덕’에 세워진 위령탑. 이역만리에서 고향을 그리다가 죽은 이들은 넋이라도 고향으로 가겠다며 고향 방향으로 묘를 썼다고 한다.

1945년 8월 광복이 되었다. 사할린의 4만여 한인에게 광복은 곧 ‘집에 가는 것’이었다. 브이코프, 홈스크, 삭조르스크, 우글레고르스크에서 살던 한인들은 살던 집을 버리고 가꾸던 텃밭도 남겨둔 채 봇짐을 둘러메고 수백㎞ 떨어진 코르사코프항으로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참새떼처럼 까맣게 모여앉아 사할린 겨울의 모진 바람을 맞으며, 고향 바다 어디쯤에선가 올 귀국선을 기다리고 기다렸다. 먹고살기 위해 일터로 나갔다가도 해만 떨어지면 행여 배를 놓칠까 항구로 다시 몰려들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기다리다 ‘누군가는 굶어 죽고, 누군가는 얼어 죽고 또다른 누군가는 미쳐 죽어’ 무덤이 언덕을 메웠다.

◆ 버려지고 잊힌 사람들

코르사코프는 사할린의 가장 큰 항구도시다. 사할린으로 들어오는 교통수단이라고는 배편뿐이던 예전에는 사할린과 홋카이도를 연결하는 주된 교통 요지였다. 전쟁이 끝나고 일본인들이 귀환할 때 이용했던 귀항지이기도 하다.

사할린 한인들은 배가 들어왔다는 소문이 들리면 항구로 몰려들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본인들을 바라보면서 ‘우리도 곧 고국으로 돌아가는 배를 타리라’ 희망에 부풀었다. 그러나 배는 끝내 오지 않았고 기다림에 지친 이들은 고향 땅이 보이는 언덕에 하나둘씩 묻혔다. 코르사코프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망향의 언덕’에 세워진 위령탑은 이들의 넋을 위로하는 탑이다.


항구에 까맣게 모여든 4만 사할린 韓人
배 놓칠까 못 떠나다 굶어죽고 미쳐죽고…
연이은 분단·전쟁·가난에 귀국길 좌초
日은 1949년 마지막배까지 31만 이송 대조

51년 日국적 박탈 뒤 蘇는 무국적자로 억류
“이곳서 서러움 많아도 곧 한국 갈거니까”
소련국적 취득 거부하며 끝까지 버텼지만…


종전 이후 남사할린에 남아있던 조선인은 4만3천여명에 이른다. 하지만 1946년 12월9일 체결된 ‘소련지구송환미소협정’에 따라 귀환대상자는 ‘일본인 포로’ ‘일반 일본인’으로 한정됐다. 일본은 일본 호적에 등재된 사람만 일본인으로 간주하고 본국으로 송환했다. 1946년 12월 일본의 귀국선이 홈스크항에서 일본 하코다테로 향한 후 1949년 7월23일 마지막 귀국선 운센마루가 사할린을 떠날 때까지 총 31만명의 일본인이 귀국했다.

우리나라는 일제 말 인구의 20% 이상이 해외에 거주하는 전형적인 유민(流民)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19세기까지 해외 거주 인구가 거의 없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유민의 역사는 일본 침략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1945년 광복과 함께 이들 유민은 마땅히 한국으로 돌아왔어야 했다. 그러나 연이은 분단과 전쟁, 가난으로 귀국길은 막혀 버렸다.

사할린 한인들에 대해 가장 직접적 책임이 있는 일본 정부는 식민지 지배와 전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러시아는 국제정치적 역학 관계와 노동력 보충이라는 현실적 요구에 따라, 한국은 반공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이들을 버렸다. 그렇게 이산의 아픈 역사가 시작됐다. 이후 70년, 그렇게 헤어진 이산가족과 해외동포의 귀환과 정착을 위한 제도는 여전히 미미하다.

◆ 무국적자로 50년을 버티다

사할린에 남겨진 한인들은 어떤 보호도 받지 못했다. 전쟁에서 패한 일본은 남사할린에 남겨진 일본인을 송환시키면서 조선인은 배제했다. 그러다가 일본은 1951년, 사할린 한인들의 일본 국적을 박탈해 버렸다. 소련은 국적법에 따라 사할린 한인을 무국적자로 규정하였다. 러시아는 20만명 넘는 일본인들이 귀환하면서 사할린 내 노동력 부족 위기에 직면하자 한인들을 무국적자라는 취약한 위치로 만들어 이들을 사할린에 억류시켰던 것이다. 무국적자는 러시아 내에서도 거주지에서 4㎞ 이상 떨어진 다른 지역으로의 이동권이 제한됐다. 사실상 살고 있던 행정구역 밖으로 못 벗어났던 셈이다. 그렇게 사할린 한인들의 또다른 ‘창살 없는 감옥’ 생활이 시작됐다.

영일군이 고향인 김임순씨(79)와 남편 한문형씨(82)는 영주 귀국한 한인 1세대다. 강제 징용된 아버지를 따라 온 가족이 사할린으로 왔다. 아버지는 젠놉스크에서 탄부로 일했다. 광복이 돼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온 가족이 이곳 코르사코프로 왔다. 배를 기다리던 그 하루하루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시간이다. 기다리는 날이 길어질수록 아버지는 자주 술을 마셨다. 술을 마시는 날엔 고향 생각에 울기만 했다. 그런 아버지를 따라 온 가족이 울었다.

“친한 소련 공산당원이 ‘소련 국민은 한국을 가도 무국적자인 한인은 절대 한국을 갈 수 없다’고 충고를 했어. 전 세계 어디라도 소련 국민은 가지만 한인은 못 간다. 그래서 소련 국적을 받으면 한국 가는 길이 열리려나 하면서 그 친구의 충고를 받아들여 1952년에 일찌감치 소련 국적을 받았지. 하지만 버티다가 힘들고 모진 세월을 보낸 사람이 한둘이 아니야.”

무국적자 사할린 한인들은 취업 자체도 제한적이었고 급여나 진급에 있어서도 차별을 받았다. 스스로의 권리를 포기하고 무국적의 설움과 불이익을 감수하며 끝끝내 소련 국적을 취득하지 않았던 것은 고향으로 돌아갈 때 행여라도 국적이 문제 되지 않을까 하는 오직 그 이유였다.

“소련 국적이 있으면 한국으로 못 가면 어떻게 하나, 그게 걱정이었지. 당장 아이들 공부도 제대로 못 시키고, 멀리 갈 수도 없고, 번듯한 직장에 취직도 못해도 곧 한국으로 돌아갈 거라 믿었던 거지. 언제든지 한국 간다. 가야 되지. 거기 친척들도 있고 부모도 있고 형제들도 있으니 그게 언제라도 가야 한다. 그때가 되면 언제라도 떠날 수 있도록 모든 준비를 하고 있어야지. 그랬던 거야.”

그들에게 이곳에서의 하루하루는 고향으로 떠나는 그날을 위해 존재했을 뿐이었다. 이토록 간절한 그들의 열망에 우리는 어떤 화답을 했던가.

글·사진 = 러시아 코르사코프에서 이은경기자 lek@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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