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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曲기행 .13] 안강 옥산구곡(上)...‘동방오현’ 이언적 은거지…死後 250여년 뒤 이가순이 아홉굽이 명명

2018-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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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산구곡의 삼곡인 세심대의 작은 소(沼)인 용추. ‘마음을 씻는 대’라는 의미의 세심대는 옥산서원 옆에 있는 계곡의 암반인 너럭바위다. 이곳에는 이황의 글씨를 음각으로 새긴 ‘세심대(洗心臺)’와 ‘용추(龍湫)’를 확인할 수 있다.

옥산구곡(玉山九曲)은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옥산천(玉山川)에 설정된 구곡으로, 회재(晦齋) 이언적(1491~1553)의 유적이 그 중심이다. 옥산서원과 독락당 등 이언적의 자취가 남아 있는 옥산천에 설정된 구곡이지만, 이언적이 설정하고 경영한 것은 아니다. 조선 후기 하계(霞溪) 이가순(1768~1844)이 설정한 구곡이다. 이가순은 옥산서원을 방문한 뒤 이언적의 은거지에 구곡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옥산구곡을 설정하고 옥산구곡시를 지었다. 이가순이 언제 옥산을 방문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이언적 사후 250여 년 뒤에 이황의 학문에 큰 영향을 끼친 이언적의 은거지를 방문해 옥산천 일대를 유람하고 옥산구곡을 설정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설정한 옥산구곡은 이언적의 자취가 남아 있는 굽이였다.

◆회재 이언적 은거지에 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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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심대 옆에 자리한 옥산서원.

경주 양동마을에서 태어난 이언적은 동방오현의 한 사람으로 조선 성리학의 토대를 마련한 유학자다. 주자를 흠모해 자신의 호를 주자의 호인 ‘회암(晦庵)’에서 따와 ‘회재(晦齋)’로 지을 정도였지만, 학문적으로는 독창적인 성리학의 세계를 주창했다.

경주 안강의 독락당(獨樂堂) 일대는 그가 김안로와 대립하며 관직에서 밀려나 있을 때 은거한 곳이다. 이언적은 42세 때 자옥산 아래 독락당을 지어 살면서 주변 바위들을 선정해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선생은 젊어서 그곳의 바위 골짜기가 괴이하고 시내 못이 청결한 것을 사랑했는데, 이때에 비로소 시냇가에 집을 지으니 수십 칸이다. 가난하여 공사를 제대로 할 수 없어 오랜 시간이 지나서 완공하고 독락당이라 이름하였다. 다섯 대를 두고 탁영대, 징심대, 관어대, 영귀대, 세심대라 하였다. 또 관어대 위에 작은 정자를 세우고 첫째 칸은 정관재(靜觀齋)라 하고, 둘째 칸은 계정(溪亭)이라 하였다. 정자 전후에 소나무, 대나무, 꽃과 풀을 심고 날마다 그사이에서 읊조리고 노닐거나 낚시하며 세상의 어지러움을 사절하였다.’ <회재선생연보>


이언적 경주 양동마을서 출생
조선 성리학 토대 마련 유학자
자옥산 아래 독락당 짓고 살아
주변 바위 선정 이름 붙이기도

後代 옥산서원 방문한 이가순
‘이언적 바위’ 중심 구곡 설정
옥산구곡시 지어 이상향 노래



이가순은 이언적이 명명한 지점을 중심으로 구곡을 설정, 성리학적 이상세계로 만들려고 했다. 옥산구곡은 제1곡 송단(松壇), 제2곡 용추(龍湫), 제3곡 세심대(洗心臺), 제4곡 공간(孔澗), 제5곡 관어대(觀魚臺), 제6곡 폭포암(瀑布巖), 제7곡 징심대(澄心臺), 제8곡 탁영대(濯纓臺), 제9곡 사암(獅巖)이다.

이가순은 서시에서 이언적의 은거지인 옥산구곡을 주자의 무이구곡에 비유한다.

‘신령함을 기르기 좋은 곳 원기 넘치는 경주땅(元氣東都好毓靈)/ 자옥산은 첩첩 자계는 맑다네(紫山增重紫溪淸)/ 외로운 배로 진원을 거슬러 오르려니(孤舟欲眞源去)/ 뱃노래 소리 새로이 굽이굽이 들리네(乃新聆曲曲聲)’

자산(紫山)은 자옥산, 자계(紫溪)는 옥산천을 말한다. 동도(東都)인 경주는 신령한 기운이 넘쳐 자옥산이 깊고 옥산천이 맑다고 읊은 뒤, 외로운 배로 옥산천을 거슬러 올라 도의 근원에 이르고자 하니 뱃노래 소리가 굽이마다 들린다고 노래하고 있다. 뱃노래는 바로 주자가 무이구곡을 거슬러 오르며 불렀던 노래 ‘무이도가’를 말한다.

◆설정자 이가순의 옥산구곡시

‘일곡이라 낚싯배 매어두고 송단에서 읊조리다가(一曲吟壇繫釣船)/ 긴 옥산천에 비친 화산을 돌아본다(回看華岳映長川)/ 낯익은 물고기와 새를 신경 쓰는 이 없고(慣顔魚鳥無人管)/ 푸른 소나무 저녁 안개 속에 서 있을 뿐(只有蒼松立暮煙)’

1곡 송단은 옥산서원으로 들어가는 옛길 초입에 있는, 시냇물이 깊어지는 곳이라고 한다. 화산은 화개산이고, 장천은 옥산천을 말한다. 낯익은 물고기와 새를 신경 쓰는 이가 없다는 것은 이언적이 별세하고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는 살아있지 않고 그 기상을 대신하는 푸른 소나무 몇 그루만 남아 있을 뿐이라며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다.

‘이곡이라 영추가 여러 봉우리를 곁에 두고(二曲靈湫傍亂峰)/ 긴 세월 우레비 내려 폭포 되네(長時雷雨任春容)/ 모든 사람들 간절히 운예를 바라는데(蒼生擧切雲霓望)/ 누가 상암을 구중과 막히게 했는가(誰遣商巖隔九重)’

2곡 용추는 옥산서원 앞 마을 입구에 있는 작은 폭포다. 폭포가 떨어지는 지점에 제법 깊은 못이 형성돼 있다. 운예(雲霓)는 비가 내릴 조짐을 말하는데, 가뭄에 단비처럼 백성들을 잘 다스려줄 위정자를 의미한다. 여기서는 이언적을 말한다. 어진 선비를 말하는 상암(商巖)도 이언적을 의미하고, 구중은 조정을 뜻한다. 누가 이언적이 조정에 나아가 경륜을 펼치지 못하게 막았는가 하는 말이다. 상암은 부열(傅說)의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부열이 죄를 지어 노역에 끌려가서 길을 닦고 있었는데, 상왕(商王)이 그를 찾아내 재상으로 등용해 나라를 잘 다스렸다는 고사다. 재야의 어진 선비를 뜻하는 말이 되었다.

‘삼곡이라 세심대는 달을 실은 배 하나(三曲心臺月一船)/ 진실로 정일(精一) 전한 지가 천년이네(眞傳精一自千年)/ 인을 체득해 선천의 학문 알게 되니(體仁會得先天學)/ 무변루의 바람과 달 더욱 어여쁘네(風月無邊更可憐)’

3곡 세심대는 이언적을 기리는 옥산서원 옆 시내의 너럭바위다. 이가순은 세심대에서 1천년 전의 학문, 즉 공자의 도를 알게 되었다. 그래서 옥산서원 무변루의 바람과 달이 새롭게 보인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정일(精一)은 도심(道心)을 말한다. 세심대 굽이에는 작은 소인 용추 옆 바위에 ‘용추(龍湫)’라는 글씨가 음각되어 있다. 이 용추는 2곡 용추와 같은 이름인데 2곡 용추는 하용추, 3곡의 용추는 상용추라고 한다. 용추 글씨는 이황의 글씨라고 한다. 그리고 너럭바위 가운데 있는 작은 바위에는 ‘세심대(洗心臺)’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 글씨 역시 이황 글씨다. 옥산서원은 1573년에 이언적을 기려 창건되었고, 1574년에 사액받았다. 서원 강당 처마에 걸린 ‘옥산서원’ 편액 글씨는 추사 김정희의 것이고, ‘무변루(無邊樓)’ ‘구인당(求仁堂)’ ‘암수재(闇修齋)’ 등은 한석봉 글씨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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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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