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현 형사전문변호사(법학박사) www.brotherlaw.co.kr |
지난달 19일 대법원은 보이스피싱 범인들에게 통장을 빌려준 후 피해금이 입금되자 돈을 출금해 가로챈 A씨와 B씨(이하 ‘A’라고만 한다)에게 횡령죄 유죄판결을 선고했다. 횡령죄는 돈 주인과 보관자 간 위탁관계가 인정돼야 가능한 범죄인데, 도대체 법원은 A가 누구의 돈을 보관한 것으로 보았을까.
종전에 대법원은 계좌명의인이 보이스피싱 범죄에 애초부터 가담해 그가 사기방조범이 된 경우 자신이 가담한 범행의 결과 피해금을 보관하게 된 것을 두고 피해자와의 사이에 위탁관계가 인정될 수는 없다고 봤다. 그래서 돈을 찾아도 피해자에 대한 횡령죄가 안 된다고 했다. 사기죄 완성 후 이체된 돈을 찾는 것 정도로는 새로운 법익을 침해한 것도 아니다(대판 2017도3045: 대판 2017도3894 판결).
그런데 이 사건은 A가 보이스피싱 사기에 가담한 사건이 아니다. A는 단순히 통장을 건네줬고, 피해자가 보이스피싱에 속아 돈을 보내오자 이 돈을 인출해 가로챘을 뿐이다. 그렇다면 계좌명의인이 애초부터 사기공범이 아니고 여하한 이유로 자기 통장에 들어온 돈을 찾은 것인데, 이는 위 사례와 달리 볼 수 있는가. 이는 형사정책적으로도 매우 중요하다. 횡령죄로 처벌된다면 통장을 함부로 빌려주거나 들어온 돈을 가로채는 일이 줄어들 것이다.
A가 보관의무를 지는지 경우를 나눠 살펴야 한다. 첫째, 사기범과의 명시·묵시의 약속은 보호받을, 지켜져야 할 약속인가. 만약 그렇다면 A는 사기범이 피해금을 빼 갈 때까지 돈을 인출하면 안 된다. 대법원은 A가 통장을 범인에게 넘겨줬어도 은행에 대한 예금채권자는 어디까지나 A라고 봤다. 범인들은 사실상 인출권을 부여받았을 뿐 법적 권리자가 아니다. 또 A와 범인 간에 법적 보호를 받을 위탁관계는 인정할 수 없고 인정해서도 안 된다. 그래야만 피해금이 사기꾼에게 귀속되지 않게 된다. 결국 A가 범인들의 돈을 가로챈 것은 아니므로 A는 사기범의 돈을 횡령한 것이 아니다. 둘째, 속아 돈을 보낸 피해자와 A 사이에는 얼핏 보면 아무런 보관위탁이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송금의뢰인과 수취인 사이에 계좌이체의 원인이 되는 법률관계가 존재하지 않은 경우 수취인에게 반환의무를 지운 사례(대판 2013다207286 판결), 착오 송금에서 예금주와 송금인 사이의 신의칙상 보관관계를 인정해 횡령죄로 처벌한 사례(대판 2010도891 판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이 사건의 A도 아무런 법률 관계 없이 송금된 피해자의 돈을 그를 위해 보관할 책임을 진다고 봄이 마땅하다. 그리고 보관책임에 위배해 돈을 인출했다면 영득의사가 인정돼 피해자에 대한 관계에서 횡령죄가 된다고 봐야 한다(대판 2017도17494 판결). 이제 보이스피싱 피해금은 통장명의인이 함부로 인출할 수 없게 되었고, 반사적으로 피해자는 돈을 돌려받을 수 있게 됐다.
결국 A는 통장을 빌려준 전자금융거래법위반죄와 피해자에 대한 횡령죄로 처벌된다. 공짜는 없고 임자 없는 돈도 없다는 점에서 A의 행위는 비난받아 마땅한 반면 최근 대구에서 한 여성이 길에 뿌린 거액의 돈을 자진해 수사관서에 전달한 시민들은 특기할 만하다. 천주현 형사전문변호사(법학박사) www.brotherlaw.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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