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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달성에서 꽃피운 역사인물 .8] 대구 유학사 큰 족적 남긴 낙재 서사원(1550~1615)

2020-08-27

대구 儒學 르네상스 연 주역…임란땐 의병장 맡아 구국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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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달성군 다사읍 이천리에 자리잡은 이강서원. 낙재 서사원을 배향하는 서원으로 1639년(인조 17) 서원의 모습을 갖췄으나 1871년(고종 8) 훼철된 뒤 복설되지 않았다.

"나라가 파괴되고 집이 망했으며, 임금이 피란했으니 조금이라도 혈기를 가진 이라면 누구인들 피로 얼굴을 적시고 눈물을 삼키지 않을 수 있으랴. 활과 화살을 소지하고 궁시가 없으면 창이나 칼, 혹은 도끼를 잡되 모두 자루를 길게 하라". 임진왜란 당시 대구지역 의병장을 지낸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이 향병 모집을 위해 지은 '초집향병문(招集鄕兵文)'의 한 구절이다. 그는 온 나라가 황폐화되고 백성들이 도륙당하는 처지를 통탄하며 지역민들이 분연히 일어나 적에 대항하기를 주문했다. 평생 학문 연구에만 힘을 쏟은 문인이면서도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목숨을 걸고 지역 의병 활동의 중심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또한 그는 전쟁이 끝난 뒤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 후학 양성을 통해 대구 유학의 르네상스 시대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계동(溪東) 전경창(全慶昌), 송담(松潭) 채응린(蔡應麟), 임하(林下) 정사철(鄭師哲)의 학문을 이어 지역 학풍을 후대에 계승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달성에서 꽃 피운 역사 인물 8편'에서는 낙재 서사원의 삶에 대해 다룬다.

◆지역민을 먼저 생각한 달성 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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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원의 묘소는 달성 서씨 선산이 아닌 달서구 호산동에 위치하고 있다.

서사원의 본관은 달성(達城)이다. 달성 서씨는 대구지역에서 명망이 높은 가문 중 하나다. 대구를 근거로 오랜 기간 세거했을 뿐 아니라 사회적 신분에 요구되는 도덕적 의무도 실천해왔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달성공원 일대를 나라에 헌납하면서 지역 백성들의 세금을 감면받게 해 준 일화다.

달성읍지 등에 따르면 세종은 달성 서씨 세거지에 요새를 짓길 원했다. 천혜의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어 군사적 요충지로 적격하다는 판단에서다. 세종이 새로 정착할 땅을 줄 테니 세거지 터를 달라고 하자 서씨 가문은 흔쾌히 협조해 포상을 받게 됐다.

하지만 구계(龜溪) 서침(徐沈)은 "나라 땅이 모두 왕의 땅인데 보상을 받음은 당치 않다"며 포상 대신 지역 백성들의 환곡(還穀)이자를 감면해 줄 것을 청했다. 환곡은 곡식을 저장했다가 백성에게 빌려주고 가을에 이자를 붙여 거두던 제도다. 이 말을 전해 들은 세종은 서침의 인품을 높이 사 그의 청을 들어줬다. 이후 지역 백성들은 조선 말까지 환곡이자를 한 섬당 5되씩 감면 받았다. 사사로운 이익보다 민초들의 고된 삶을 먼저 고려한 것이다.

전경창·채응린·정사철의 학문 계승
임란 일어나자 공산의진군 수장 역할
영남의병 활동 기록한 일기도 남겨
전쟁후 하빈현 이천에 머물며 강학
학문업적 기려 1639년 이강서원 배향


서씨 가문의 이 같은 행동은 지역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유림들은 서침의 송덕을 기리는 서원을 세웠다. 1665년(현종 6) 조성된 구암서원(龜岩書院)의 탄생 비화다.

서씨 가문의 선행은 수백년의 세월을 지나 또다시 재현됐다. 2019년 달성 서씨 대종회가 서침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대구 중구 동산동 구암서원 터와 남은 건물을 대구시민에게 기부한 것이다.

구암서원은 동산동 일대로 한 차례 이전한 뒤 1995년 북구 산격동 연암공원 내 현 위치로 다시 옮겨졌다. 옛 구암서원 터는 2천500㎡ 규모로 감정가만 35억여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관직보다는 학문 연구에 전념

서사원은 1550년(명종 5) 6월4일 세상에 첫발을 내디뎠다. 태어난 곳은 그의 외가가 있던 경상도 성주목 팔거현(현 칠곡)이다. 6세 때 백부인 연정(蓮亭) 서형(徐)에게 처음 글을 배운 서사원은 이듬해 그의 양자가 됐다. 비교적 어린 나이에 생모를 잃은 그는 부친의 뜻을 받아 공부에 매진한다. 1566년(명종 21)에는 송담 채응린의 문하에서 수학을 시작했다. 채응린은 위기지학에 전념한 유학자로 당시 지역에서 명성이 높았다. 서사원은 학문에 탁월한 재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채응린뿐만 아니라 전경창과 정사철, 한강(寒岡) 정구(鄭逑)에게도 가르침을 받았는데 모두 그의 능력을 높이 샀다. 특히 정사철은 경전을 강학한 뒤 서사원에게 "그대는 나의 외우(畏友)"라고 극찬했을 정도다. 1575년(선조 8)에는 26세의 나이로 향시에서 장원 급제까지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같은 해 양부인 서형이 타계하고 만다.

3년간 복상을 마친 뒤 그는 1579년(선조 12) 선사(仙査·현 다사읍 이천리)에 이천정사(伊川精舍)를 지어 학문 연구와 강학의 장소로 삼았다.

1584년(선조 17)에는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됐으나 병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1587년(선조 20) 선공감 감역(繕工監監役)직을 맡았으나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2년 뒤 재차 동몽교관에 임명됐으나 이번에도 나아가지 않았다. 관직에는 큰 뜻을 두지않고 공부에만 전념한 것으로 보인다. 때때로 그는 지역 여러 곳을 탐방하기도 했다. 1590년(선조 23) 존재(存齋) 곽준 등과 더불어 안동 도산서원, 역동서원을 참배하고 청량산을 유람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듬해에는 연경서원을 찾아 화암(畵巖)을 돌아보고 퇴계의 시에 차운(次韻)을 했다고 한다.

◆임진왜란과 공산의진 의병장

강학에 매진했던 서사원의 삶이 급격하게 바뀐 것은 1592년(선조 25)의 일이다. 임진왜란이 발발, 온 나라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대구지역 인사들은 상황이 날로 악화되자 의병을 일으킬 준비를 했다. 서사원도 동화사(桐華寺)에 머무르면서 향병 모집을 독려하는 격문인 초집향병통문(招集鄕兵通文)을 짓고, 여러 인사들과 의논해 향병입약(鄕兵立約)을 제정했다.

지역 의병장직도 그가 맡게 됐다. 당시 의병장으로 추대된 정사철이 연로한 나이 탓에 직수행을 고사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임진년 7월6일 공산의진군(公山義陣軍)이 조직됐다. 서사원 외에도 모당(慕堂) 손처눌(孫處訥), 낙애(洛涯) 정광천(鄭光天) 등이 뜻을 함께했다. 대구부사도 군사를 편성하면서 서사원이 참여하도록 배려했다.

수장 역할을 해오던 서사원은 연이어 상(喪)을 당해 손처눌에게 의병장직을 맡겼다. 이후 그는 1594년(선조 27) 청안현감(淸安縣監)에 제수되면서 항쟁 활동을 이어나갔다. 1596년(선조 29) 7월에는 이몽학(李夢鶴)이 반란을 일으키자 군대를 이끌고 목천(木川)에 가서 반란군을 토벌하고 돌아왔다. 또 1597년(선조 30) 4월에는 군대를 이끌고 문경새재를 축성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의병 활동 외에도 그는 또 다른 유산을 남겼다. 임진왜란 시기 일기를 써 당시 영남지역 관군과 의병 활동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을 후대에 전한 것이다. 낙재선생일기에는 전쟁 직후인 1592년 4월12일부터 1595년(선조 28) 9월20일까지 3년5개월 동안의 일상이 기록돼 있다.

◆대구 유학의 르네상스를 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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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원의 묘소 관리를 위해 1860년경에 지어진 낙선재.

전쟁이 끝난 뒤에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달성군 하빈현 이천에 머물며 거처하는 곳을 '미락재(彌樂齋)'라 이름 붙였다. 이때부터 자신의 호를 미락재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나중에 '미(彌)'자를 떼고 '낙재(樂齋)'로 호를 고쳤다. 또한 성리학 연구도 본격적으로 파고들었다. 그는 특히 퇴계의 문집을 즐겨 읽으며 퇴계학을 지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601년(선조 34)에는 전쟁으로 불탄 선사재(仙査齋)를 다시 지어 강학 장소로 삼았다. 선사재는 고운 최치원이 해인사에 들어가기 전 잠시 머문 적이 있는 선사암 옛터에 정사철이 세운 서재다. 서사원은 대구 유학 1세대로 평가받는 전경창·채응린·정사철 세 명의 인물 가운데 정사철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는 1601년부터 꾸준히 나라의 부름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다만 손처눌 등과 함께 지역 유생을 모아 선사재와 연경서원에서 강학하며 대구의 문풍을 진작시켰다. 당시 그는 학생들과 강학하면서 "자고로 후학들이 힘을 얻을 곳으로 주자서만 한 것이 없다"며 강조했다고 한다.

평생을 학문 연구와 함께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인 그는 대구 유학의 전성기를 꽃 피운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시 문학적으로도 업적을 남겼다. 금호강의 경치를 감상하며 시를 짓는 것을 즐겼는데, 선유에 참여한 문인들과 어울리며 탈속적 감성과 도학적 감성을 공유했다. 대구 유학사의 큰 족적을 남긴 그는 1615년(광해군 7)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1639년(인조 17) 달성군 다사읍 이천리에 있는 이강서원(伊江書院)에 배향됐다.

글=박종진기자 pjj@yeongnam.com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문헌= 대구의 뿌리 달성, 제5권 달성에 살다. 향토문화전자대전. 낙재 서사원의 생애와 강학 및 임진란 창의, 구본욱.
▨자문= 송은석 대구문화관광 해설사
공동기획=달성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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