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여름 생겨 가을되자 절정
농구공만 한 감나무 말벌집
소방관 출동에도 퇴치 실패
온동네 겁에 질리게 하더니
초겨울 직박구리가 쉬 섬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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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창 문학평론가 전 영남대 교수 |
지난 늦여름 긴 장마가 끝나자 우리집 감나무에 말벌집이 생겼다. 까마득히 높은 우듬지에 집을 짓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무성한 잎에 가려 보이지 않다가 차츰 커지면서 농구공만 한 벌집이 멀리서도 보일 정도가 되었다.
가을이 되면서 감이 익어갔지만 웅웅거리며 설쳐대는 말벌들의 독침에 쏘일까봐 옥상에 올라가 딸 엄두를 내지 못했다. 동네 사람들도 지나가면서 말벌집을 손가락질하며 "저걸 어쩌냐"고 걱정을 했는데, 나는 건드리지만 않으면 사람을 공격하지는 않을 테니 벌들이 동면에 들어가는 겨울까지 기다렸다가 그때 가서 어떻게 해보겠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어느 날 윗집 아저씨가 찾아와서 "말벌들이 수시로 마당 위로 날아다녀 겁이 나 못살겠으니 소방서에 신고해서 벌집을 없애야겠다"고 통고했다. 119에 신고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소방차가 달려왔는데, 좁은 골목길로 차가 들어올 수 없어 방호복을 입은 소방관들이 큰길에서 긴 소방호스를 끌고 와서 감나무 꼭대기를 향해 세찬 물대포를 쏘아 벌집을 떨어뜨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동안 동네 사람들은 소방관들의 지시대로 모두 집안에서 문을 닫고 기다려야 했다.
어쨌든 이제 벌집이 없어질 테니 말벌들도 다른 곳으로 옮겨가겠지 하고 안심했는데, 그건 오산이었다. 두어 시간이 지난 다음 조심스럽게 나와 보니 말벌집은 거의 다 없어지고 약간의 흔적만 남아 있었지만 집을 잃은 말벌들은 흩어지지 않고 감나무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말벌들은 정말 자기 종족에 대한 충성심이 강하고 단결력이 강한 독종이었다. 그놈들은 흩어지기는커녕 일사불란하게 조직적으로 움직이면서 옛 집터에 새로 집을 짓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말벌들은 어디서 건축자재를 가져오는지 부지런히 왕래하면서 불과 며칠이 지나지 않아 예전 크기의 집을 다시 지었다. 그리고 몇 마리는 수시로 감나무 주위를 순찰하며 조금이라도 자기 집을 건드리는 자는 용서하지 않고 공격하겠다는 일종의 무력시위를 벌이는 것이었다.
겁에 질린 동네사람들은 소방관들이 좀더 철저하게 말벌집을 없애고 말벌떼를 섬멸하지 않은 것을 탓하면서도 다시 소방차를 부를 엄두는 내지 못하고 그저 말벌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조심하며 지냈다. 그런데 감나무 잎이 떨어지고 말벌집이 더욱 크게만 보이는 초겨울 어느날 비둘기 비슷한 새들이 감나무 가지에 모여들어 시끄럽게 울기 시작했다. 아마도 말벌 때문에 따지 못한 채 남겨둔 홍시를 쪼아 먹으려고 온 것이려니 짐작했는데 그게 아니라 십여 마리의 새들이 번갈아가며 말벌집을 쪼아대는 것이 아닌가.
인터넷을 뒤져 찾아보니 생김새와 울음소리로 보아 그 새들은 직박구리인 것 같았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텃새인데 말벌집을 공격하여 먹이로 삼는 천적이라고 한다. 기세등등하게 설치며 꿀벌들과 곤충들을 잡아먹고 동네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하던 말벌들은 직박구리들이 다 잡아먹었는지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말벌들이 공들여 다시 지어놓은 집은 곳곳에 구멍이 뻥 뚫린 채 허물어지고 말벌들이 낳아놓은 새끼 애벌레들을 직박구리들은 신이 나서 맛있는 잔치 음식처럼 먹어치운다. 한 때 천하무적의 조폭집단처럼 기세등등하던 말벌들도 허무하게 스러질 날이 온 것이다. 말벌도 한철이요, 달도 차면 기우나니 자연의 돌고 도는 이치를 누군들 거스를 수 있을 것인가.
정지창 문학평론가 전 영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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