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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기행 .13] 안동 병산서원(上)...서애 류성룡의 덕 품은 곳, 사방 트인 만대루서 '사계절의 명화' 감상

2021-03-08

1613년 존덕사 짓고 이듬해 위패 봉안되며 서원으로 승격
'우리나라 건축사의 백미' 명성에 걸맞은 만대루 건축방식
낙동강 백사장·병산이 서원 앞마당처럼 마주하도록 설계
계단·기둥목재마저 자연 그대로의 모습 살려 사용해 눈길
서애 셋째아들 류진이 심은 배롱나무, 여름이면 절경 이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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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산서원 강당 마루에 앉으면 눈에 들어오는 풍경. 만대루와 그 너머 낙동강 및 병산이 멋지게 어우러진다.

병산서원은 근처 하회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란 서애(西厓) 류성룡(1542~1607)을 기리는 서원이다. 1613년에 사당인 존덕사(尊德祠)를 짓고 이듬해 류성룡의 위패를 봉안하면서 서원으로 승격된 병산서원은 주변 풍광이 어느 서원보다 빼어나다. 서원 앞 적당한 거리에 병산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고, 병산을 끼고 낙동강의 맑은 물이 은빛 백사장을 적시며 굽이쳐 흘러간다.

 철마다 시간마다 다르게 펼쳐지는 이 풍광을 가장 잘 누릴 수 있는 공간이 병산서원 누각인 만대루(晩對樓)다. 강당인 입교당 마루에 앉아 만대루와 어우러지는 이 풍광을 보는 것도 멋지다. 우리의 옛 건축이 자연과 얼마나 조화롭게 어우러지는지, 그 아름다움의 진수를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병산서원 만대루나 입교당에 올라 느긋하게 풍광을 감상하면 병산서원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원 건축으로 한국 건축사의 백미'라는 표현이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최근 보물로 지정된 만대루

서원의 정문인 '복례문(復禮門)'을 들어서면 바로 좌우로 긴 누각인 만대루를 마주하게 된다. '복례'는 '자신을 극복하고 예로 돌아가라'는 논어의 '극기복례(克己復禮)'에서 따온 말이다. 왼쪽으로 눈길을 주면 작은 연못 '광영지(光影池)'가 보인다. 땅을 의미하는 네모진 연못 가운데 하늘을 상징하는 둥근 섬을 둔 '천원지방(天圓地方)' 형태의 연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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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산서원 연못 '광영지'.

'광영지' 이름은 주희의 시 '관서유감(觀書有感)'에서 가져온 것이다.

'조그마한 연못은 거울 같아서(半畝方塘一鑑開)/ 하늘빛과 구름이 함께 노닌다(天光雲影共徘徊)/ 묻건대 어찌하여 그리 맑은가(問渠那得淸如許)/ 끝없이 샘물 솟아 그렇다네(爲有原頭活水來)'

병산서원 건물 중에서도 만대루는 그중 백미로 꼽힌다. 정면 7칸, 측면 2칸 누각인 만대루는 사방이 다 트여 있다. 전방 8개와 측면 3개 기둥 사이 드러난 각각 7칸, 2칸의 공간이 화면처럼 병산과 낙동강의 풍광을 담아낸다. 누각 위에서 병산을 바라보면 7폭의 병풍산으로 다가온다.

자연의 경치를 빌려 건축의 한 구성요소로 활용하는 '차경(借景)'의 대표적 사례로, 낙동강 백사장과 병산이 서원의 정원이 되도록 한 건축적 장치가 만대루다. 건물 자체도 우리의 전통 미의식이 잘 드러나 있다. 건물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 목재들은 휘어진 그대로 대충 다듬어 사용하고 있다. 다채로운 모습이 운율을 느끼게 한다. 기둥 아래를 받치고 있는 주춧돌 역시 자연석을 그대로 활용하고 있다. 크기도 모양도 높낮이도 각기 다르다.

누각 마루에 오르는 계단도 눈길을 끈다. 굵은 통나무를 도끼질로 서너 곳을 잘라 계단으로 삼았다.

휴식과 강학의 공간인 만대루의 이름은 당나라 시인 두보의 시 '백제성루(白帝城樓)'의 구절인 '취병의만대 백곡회심유(翠屛宜晩對 白谷會深遊)'에서 따왔다. '푸른 병풍처럼 둘러쳐진 산수는 늦을 녘 마주 대할 만하고, 흰 바위 골짜기는 여럿이 모여 그윽하게 즐기기 좋구나'라는 뜻이다.

병산서원 만대루는 2020년 보물 제2104호로 지정됐다.

만대루 아래를 지나 가운데 계단을 오르면 작은 마당을 중심으로 전면에 강당 건물인 입교당(立敎堂)이, 좌우에 서재와 동재가 눈에 들어온다. 동재와 서재 앞에는 매화나무가 한 그루씩 서 있다. 입교당은 1.8m의 기단 위에 세워져 있다. 정면 5칸 건물인데, 가운데 3칸은 대청이고 좌우에 방이 하나씩 있다. 동쪽의 '명성재(明誠齋)'에는 서원의 원장이 기거했으며, 서쪽의 '경의재(敬義齋)'는 부원장이나 교수들이 머물렀다. 입교당 마루에 앉으면 만대루와 어우러진 낙동강과 병산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계속 앉아있고 싶게 만드는 풍경이다.

그리고 상급생 기숙사인 동재는 '거동을 바르게 하라'는 뜻을 담은 '동직재(動直齋)'다. 하급생을 위한 서재는 '정허재(靜虛齋)'이다. 두 건물은 각각 2개의 방과 가운데 1칸 마루로 구성돼 있다. 강당 쪽의 작은 방은 학생회장 격인 유사(有司)의 독방이거나 서적을 보관하는 장서실이다. '좌고우저'의 원리를 좇아 동재에는 상급생들이, 서재에는 하급생들이 기거했다.

◆사당은 존덕사

입교당과 동재 사이를 돌아 들어가면 서애 류성룡과 그의 아들 수암 류진의 위패가 모셔진 존덕사가 나타난다. 존덕사는 서애 류성룡의 학문과 덕행을 높이 우러른다는 뜻에서 지은 명칭이다. '중용'에 나오는 '군자는 덕성을 존중하며, 묻고 배움을 길로 삼는다(君子尊德性而道問學)'에서 따온 것이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 건물이다. 출입문인 삼문에는 태극문양이 그려져 있고, 4개 기둥 초석에는 팔괘가 그려져 있어 눈길을 끈다.

존덕사 아래 양쪽에는 책을 찍는 목판을 보관하던 '장판각(藏板閣)'과 사당에 올릴 제수를 준비하던 '전사청(典祀廳)'이 들어서 있다.

사당으로 오르는 계단 좌우와 전사청 마당 등에는 배롱나무 고목 여러 그루가 여름이면 별천지를 만든다. 이곳 배롱나무는 2008년 안동시 보호수로 지정되었는데, 1613년 사당 존덕사를 건립하면서 류성룡 후손인 류진이 심었다고 전한다.

병산서원의 역사는 고려 때부터 안동 풍산현에 있던 풍악서당(豊岳書堂)에서 비롯된다. 풍악서당은 류성룡이 1575년 현재의 병산서원 자리로 옮기고 이름도 병산서당으로 고쳤다. 1613년에 류성룡의 제자 정경세, 이준 등과 유림이 힘을 모아 사당인 존덕사를 세우고 이듬해 류성룡의 위패를 봉안함으로써 강학과 제향 기능을 갖춘 서원이 되었다. 1662년에는 류성룡의 셋째아들 수암(修巖) 류진(1582~1635)이 추가로 배향되고, 1863년에 사액서원이 되었다.

류성룡의 시호는 문충(文忠). 1542년 의성군 사촌마을 외가에서 류중영(柳仲영)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1566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도승지, 예조판서, 우의정, 도체찰사, 영의정 등 관직을 역임했다. 도학(道學)과 문장, 덕행 등으로도 이름을 떨치며, 특히 영남 유생들의 추앙을 받았다. '서애집(西厓集)' '징비록(懲毖錄)' 등 저서를 남겼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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