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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스토리텔링 2010] 동해안 일천리 이야기 세상 <8> 이상국의 '淸황제를 죽이러 가다, 울진 장대룡장군'

2021-05-26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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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4년 여름, 불영계곡을 건너는 다리 앞에서 말을 탄 사내 하나가 큰 소리로 시를 읊었다.

삼척용천만권서(三尺龍泉萬卷書) 황천생아의하여(皇天生我意何如) 산동재상산서장(山東宰相山西將) 피장부혜아장부(彼丈夫兮我丈夫) (석자의 용천검은 만권의 책이로다/하느님이 나를 만드셨으니 그 뜻은 무엇인가/산동에는 재상이 있고 산서에는 장수가 있도다/저들이 대장부라면 어찌 나는 대장부가 아닐소냐)

그때 뒤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사내가 뒤를 돌아보니 계곡의 바위 끝에 한 스님이 서 있었다. 떡 벌어진 어깨판에 후리후리한 키, 백팔 염주를 목에 걸고 해진 가사(袈裟)에 찢어진 장삼을 입었다. "뉘기에 감히 내 뜻을 비웃는가?" "그대의 뜻을 비웃는 것이 아니옵니다. 이 궁벽한 곳에서 임경업장군의 대의(大意)를 접하니 감개가 무량하여 나도 몰래 웃음이 터진 것이옵니다."

말을 타고 있던 사내는 거구에 푸른 눈썹을 지녔다. 이름은 장대룡(張大龍, 1592-1645). 그는 고려 때 울진부원군을 지낸 장말익의 19대손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그 해 봄에 울진읍 호월리(옛 지명은 무월(舞月))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의 태몽에 큰 용 한 마리가 몽천(蒙泉, 울진군 원남면 금매리 산밑에서 솟는 샘물)에서 솟아올라 품으로 들어와 안기더니 함께 하늘로 올라가 큰 불을 뿜어냈기에 이름을 대룡이라 했다. 어릴 때부터 덩치가 컸던 그는 '장군소년'으로 불렸는데 어느 날 그의 집 앞 연못에 검은 말 한 마리가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7세 소년은 달려들어가 그 말을 구해냈고 말을 꺼내자마자 그 위에 올라타서 들판을 내달렸다. 이 지역 이름이 마평(馬坪)으로 불리는 건 그 때문이다.

그와 임경업장군은 인연이 깊다. 1618년 두 사람은 똑같이 무과에 급제를 한다. 1633년 청북방어사에 임명된 임경업은 별장(別將)으로 장대룡을 불렀다. 3년 뒤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두 사람은 국경의 백마산성에서 침입해올 여진족 군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후금(後金, 이후에 淸) 선발대였던 마부태(馬夫太)는 백마산성의 임경업부대를 우회하여 한양으로 내달린다. 1637년 정월 남한산성에 피신한 인조가 청나라와 굴욕적인 화의를 했을 때 두 사람은 허탈하기 그지 없었다. 2월에 청나라는 조선에 병력 동원을 요청한다. 이때 임경업은 수군장에 임명되어 명나라를 치러 간다. 이때 장대룡은 말한다. "저는 어제의 동지인 명을 치는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임경업은 그에게 이렇게 속삭인다. "나 또한 그러하네. 하지만 나라의 명이니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다만 시늉만 할 터이니 나를 도와주게." 대룡은 고개를 저었다. "장수가 되어 시늉만 하는 전쟁을 하는 것이 어찌 장부의 도리이겠습니까. 저는 고향으로 돌아갈까 합니다." 울진으로 돌아온 그는 날마다 통음하다 불영계곡에서 개남(介南)을 만났다.

개남은 명나라 사람이었는데, 명나라가 풍전등화에 이르자 출가하여 천리를 방황하다가 조선에까지 들어왔다. 그가 임경업을 만난 것은 1643년 봄이었다. 임장군은 끝까지 대명(對明)의리를 지키며 명나라와의 싸움을 제대로 하지 않았는데, 청나라에 이같은 사실이 알려졌다. 조선관군은 임경업을 체포하여 청나라로 넘겼다. 황해도 금천군 금교역 부근에서 압송 중이던 임경업은 밤을 틈타 도주했다. 그는 몰래 들여온 승복을 갈아입고 양주 회암사로 들어왔다. 개남은 이때 '소명'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었는데, 절치부심하는 임경업장군을 보살폈고 그와 함께 서해를 통해 중국으로 망명하는 길에 동행했다. 중국말을 잘 하는 그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소명은 상선으로 가장한 배 위에서 임장군의 칼에 새겨진 검명시(劍銘詩)를 보았다. 임경업은 명나라 황종예 군문의 마등고 휘하에 들어가 평로장군이 되어 4만의 병사를 이끄는 장수가 된다. 임장군은 모신 소명은 조선으로 다시 돌아와 불영사에 머물렀다. 인연은 이렇게 다시 엮이는가. 소명은 법명을 속명(俗名)이던 개남으로 바꾸고 정진하던 중에, 장대룡을 만난 것이다.

"장군의 얼굴을 보니 화기(火氣)가 가득하오."


"허허. 하긴 내가 태어날 때 어머니 꿈에 불을 뿜는 용이 승천을 했다 하오."
 

"태생적으로 지닌 화기에 풀지못한 원한의 화기까지 뒤섞였으니 온 몸이 불붙을 것 같소이다. 명나라 명의(名醫)였던 장개빈(張介賓)은 '경악전서'라는 책을 남겼소이다. 거기엔 화증(火症, 홧병)이 생겨나는 비밀에 대해 명쾌하게 밝히고 있습지요. 소승이 그걸 조금 읽었기에 장군의 불붙는 속을 달랠 처방을 좀 해드릴까 하오."
 

"고마운 말씀이오. 하지만 나라가 이꼴인데 나 혼자 몸이 좋아진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차라리 이 몸의 화기로 오랑캐를 모두 태워 없애고 싶은 심정이외다."
 

"소승 또한 국망에 이른 나라의 사람으로 장군의 그 심정을 왜 모르겠습니까?"
 

"조선이 건국하던 무렵 여진의 우두머리 퉁밍거티무르는 한양으로 와서 태조에게 토산물을 바치고 머리를 조아렸소. 조선은 그에게 상만호(上萬戶)라는 벼슬을 주었소. 퉁밍거티무르의 직계 후손이 바로 호란을 일으켜 조선을 침탈한 태조 누르하치가 아니오? 명나라의 승려이시니, 오랑캐에 대한 적의가 나보다 덜하지 않을 듯 하오."
 

"그러하옵니다. 조선과 명의 의리는 참으로 귀한 것인데, 오랑캐의 힘에 밀려 서로 싸우고 있는 형국이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예. 명이 저렇게 쇠락한 것은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돕다가, 여진의 발호를 제압하지 못한데도 있었습니다. 임경업장군이 그토록 의리를 중시한 까닭도 사대(事大)적 망집이 아니라 국가간의 신뢰를 중시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임장군은 시호시래부재래 일생일사도재연(時呼時來否再來 一生一死都在筵, 때를 부른다 때는 한번 오면 다시 오지 않느니/ 한번 태어나 한번 죽는 것은 바로 이 자리로다)이라 하였습니다. 나, 장대룡. 이 몸에 가득찬 화기를 불태워 누르하치, 홍타이지에 이어 황제에 오른 순치제를 죽이려 하오."
 

"소승, 청나라 수도 심양(瀋陽)으로 떠나는 길을 안내하겠습니다."
 

주막에서 술잔을 기울이던 두 사람은 문득 손을 맞잡으며 의기투합했다.

1644년 추위가 살갗에 파고드는 겨울, 그는 어린 시절부터 아끼던 말 흑비(黑飛)를 꺼내서 덜미를 어루만졌다. "이제 우리가 오랑캐의 심장에 가서 불이 되어 죽으리라." 흑비가 마치 그 말을 알아듣는듯 큰 소리로 울었다. 기다리던 개남이 왔다. "자, 이제 떠납시다." 흑비의 등에 무기를 싣고 장대룡이 올라탔다. 불영사에 들러 장대룡은 승복으로 갈아입는다. 그들은 압록강을 건너서 심양까지 강행군을 했다. 개남은 그를 황제가 사는 궁궐까지 안내했다. 그날 밤 대룡은 궁궐에 잠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궁궐에서 불꽃이 치솟거든 흑비와 함께 고향에 돌아가 이것을 전하라. 나는 결코 죽지 않을 것이며 불꽃과 함께 달려올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 그러면서 그는 속옷 하나를 벗어주었다.

장대룡은 황제가 사는 궁전의 위치를 파악했다. 경계가 삼엄하기 이를데 없었다. 몇 명의 병사를 죽였는지 모른다. 마침내 황제의 침소가 있는 곳에 다다랐다. 그는 칼을 뽑아 들고 조심조심 다가서고 있었다. 그는 우선 옆 건물에 불을 질러 소란한 틈을 타서 침소로 들어가고자 했다. 그가 목표한 곳으로 가기도 전에 수백 명이 그를 에워쌌다. 마치 풀을 베듯 베어넘겼으나 역부족이었다. "비켜라, 이놈들아. 조선을 능욕한 너희들의 황제를 나 장대룡이 심판하러 왔다. 나는 너희들의 궁궐 안에서 불과 함께 죽을 것이니 나와 함께 죽을 자는 따라 들어오라." 그는 불이 활활 타오르는 궁전으로 뛰어들었다. 이 일에 관한 기록은 중국정사 조선조 4편(국사편찬위원회에서 발간)에 짧게 전한다. "순치 2년(1645, 인조23년) 5월, 임경업의 별장 장대룡이란 자가 궁중에 잠입하여 폭역(暴逆)을 감행하다 체포되어 육시(戮屍)로 벌하고 조선에 이를 힐책하다."

한편 궁궐에서 불이 치솟자 밖에서 지키던 개남은 눈물을 주루룩 흘렸다. 그는 흑비를 타고 달리며 뒤로 고개를 돌려 불타는 궁궐을 보았다. 개남은 불꽃과 함께 달려오겠다던 장대룡의 말이 생각나 소리쳤다. "장군! 어디에 계십니까?" 그때 궁궐의 황색 연기기둥 가운데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있소." 개남은 다시 소리쳤다. "장군! 오고 계십니까?" 공중의 연기 구름 한 무리 속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가고 있소이다." 개남은 계속해서 그를 불렀고, 허공에서 장대룡은 대답했다. 압록강을 건넜을 때 대답이 사라졌다. 개남이 호월리에 돌아왔을 때 온 동네가 울음바다를 이뤘다. 장대룡의 옷을 울진읍 정림리 동쪽 사리곡에 묻었다. 장례가 끝났을 때 그의 말 흑비가 구슬프게 울더니 갑자기 푹 쓰러져 죽었다. 사람들은 그의 묘 옆에 말도 묻었다. 개남은 그 뒤 불영사에서 정진하다가 돌아갔는데, 지역의 선비들이 그를 다비하지 않고 장대룡장군의 묘 옆에 묻었다. 말과 개남의 무덤을 합쳐 개마총(介馬塚)이라 불렀다.

이상국<스토리텔링 전문기자>

◆스토리 메모
울진의 용장(勇將) 장대룡장군은 이 고장사람들도 잘 알지 못할 만큼 역사의 기억에서 소외된 인물이다. 임경업장군과 함께 전공을 세웠고 의리를 저버린 왕조에 분개하여 벼슬을 버린 기개있는 장수였다. 

 

또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일으켜 강토를 유린한 청나라를 응징하기 위해 단신으로 궁궐에 잠입해 '의거'를 도모했던 용기 또한 놀랍다. 그의 생가가 있었다는 울진읍 호월리에 기념동상(2999년 건립)이 만들어져 있다. 

 

또 울진읍 정림리 사리곡 천지봉에 있는 개마총은 오래된 사진이 전하나 장소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불영사 역사(力士)스님으로 전해지는 '개남'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알 길 없으며 임경업 장군과 개남의 인연은 상상력을 보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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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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