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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지역의 눈으로 보는 G2] 일찍 죽는 미국인

2021-08-09 15:43

얼마 전 미국에 사는 친구가 대구에 왔다. 연로한 부모를 뵈러 여름방학을 이용해 귀국한 것인데, 치과 치료를 받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잘 아는 치과의사를 소개해 주었고 그 친구는 치료와 처방에 만족했다. 

필자 역시 오래전 미국생활 중 충치를 앓은 적 있었다. 하지만 보험에 들지 않아 치료를 미뤘고, 결국 식사하다가 충치가 빠지는 일이 벌어졌다. 하얀 식탁 위에 떨어진, 까맣게 변색된 법랑질의 부러진 치아를 보니 속상했다. 한국에 있었으면 겪지 않을 일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귀국해서 임플란트 시술을 받긴 했지만.

미국인은 전체 인구의 23%에 해당하는 7천5백만 명이 치과 의료보험이 없다. 의료보험에 가입하더라도 치과 보험은 따로 비싼 돈을 들여 가입해야 한다. 이 때문에 많은 미국인이 치과 치료를 받기 위해 멕시코, 태국, 헝가리, 스페인 등으로 빠져나간다.

최고의 의학 지식과 기술을 자랑한다는 미국이지만 정작 미국인의 수명은 선진국 중 가장 짧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2019년 세계보건기구의 기대수명 데이터에 따르면, 최장수 국가는 일본으로 기대수명이 84.3세다. 이어 스위스(83.4세), 한국(83.3세)이 뒤를 잇는다. 반면 초일류국가인 미국은 77.4세로 세계 40위다. 이는 칠레(80.7세), 몰디브(79.6세), 파나마(79.3세), 터키(78.6세)보다 짧은 기대수명이다.

미국인의 의료비 지출이 세계 최고라는 점을 알게 되면 더욱 혼란스러워진다. 2019년 미국의 1인당 의료비 지출은 약 1천3백만 원(1만1천72달러)으로 독일(약 770만 원), 스웨덴(약 670만 원), 프랑스(약 630만 원), 일본(약 560만원), 한국(약 390만 원)에 비하면 압도적으로 많다.

미국인은 왜 다른 선진국 국민보다 일찍 죽을까. 의료와 보건 부문에 아무리 투자하고 테크놀로지가 아무리 발달하더라도 이 자체가 국민의 건강한 삶을 보장하지는 못한다. 과학기술은 사회적 제도와 환경, 정치적 요소와 결합해 하나의 기술생태계를 이룬다. 국민의 삶과 행복은 여기에 달려 있다.

의료보험제도는 의학자와 의료산업계가 공들여 개발한 의료기술의 혜택을 시민에게 사회적으로 배분하는 기능을 한다. 미국은 의료보험제도가 망가져 있다. 선진국 중에서 유일하게 모든 시민을 대상으로 하는 국민건강보험제도가 없다. 노인이나 저소득층을 위한 메디케어와 메디케이드, 군인 의료보험과 같은 프로그램이 있지만, 그 혜택이 충분하지 않다. 민간 의료보험에 가입하더라도 한국과 달리 미국인은 아파야만 병원에 갈 수 있다. 아프기 전 정기검진은 보장되지 않는다. 

의료보험제도는 정치적 영향을 받는다. 2010년 보험 혜택을 받지 못한 미국인은 약 5천만명(인구의 18%)에 달했다. 이에 오바마 행정부는 보수파들의 정치적 반대를 무릅쓰고 연방 차원에서 ‘환자 보호 및 적정부담 보험법’(일명 오바마케어)을 시행했다. 덕분에 약 2천만 명의 저소득층이 의료보험 혜택을 보게 됐다. 2016년 의료보험 미가입자는 약 2천800만 명으로 인구 대비 10.4%로 줄었다.

그러나 이후 들어선 트럼프 행정부의 보건정책은 개선되고 있던 시민의 건강한 삶을 잠식했다. 공화당 정부하에서 의료보험 혜택을 빼앗긴 가난한 미국인은 무려 460만 명에 이른다. 2019년 현재 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는 미국인은 약 3천300만 명으로 총인구의 12%에 달한다. 매년 약 4만5천 명의 미국인이 의료보험이 없어 제때 치료받지 못하고 죽는다. 한 시간에 약 5명씩 억울하게 죽는 셈이다. 보험안전망 밖으로 쫓겨난 이들은 주로 가난한 노동자들이나 이민자, 소수인종이 많다. 지역적으로는 텍사스, 플로리다, 조지아, 미시시피 등 보수적 남부가 심하다.

바이든 행정부가 의료보험제도를 개혁해 미국인의 건강한 삶에 기여할 수 있을까. 오바마 2기 행정부라지만 쉽지 않다. 미국 의료 및 보험 부문은 이미 민간자본이 지배한다. 이들은 로비스트를 통해 개혁 입법에 효과적으로 저항한다. 약값 역시 제약회사가 결정한다. 튜링 제약회사의 최고경영자 마틴 슈크렐리는 에이즈와 말라리아 치료제인 다라프림의 특허권을 구매한 후 가격을 13.5 달러에서 750 달러로 55배나 올려 폭리를 취했다. 그는 헤지펀드 매니저로도 유명했다.


바이든 대통령과 민주당이 의료보험을 개혁하려면 높은 정치적 장애물을 넘어야 한다. 오바마케어가 의회에서 논쟁이 됐을 때도 공화당은 기업과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고 재정부담을 폭증시킨다는 이유로 강력히 반대했다. 이로 인해 한때 16일간 셧다운(정부 폐쇄)까지 발생했다. 극적인 협상으로 의료보험개혁이 통과됐지만 여러 면에서 후퇴하는 타협안이었다. 바이든 행정부가 팬데믹 위기에서 의료보험제도를 어떻게 개혁할지 지켜볼 일이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한국의 국민건강보험을 부러워했다. 한국인은 덕분에 수명이 아주 길다. 1950년대 초반 한국인의 기대수명은 47.9세였지만 2019년 83.3세로 늘었다. 같은 기간 일본은 62.8세에서 84.3세로, 중국은 43.8세에서 75.7세로 늘었다. 격동의 현대사에서도 한국인의 수명은 매년 6개월씩 늘어난 셈이다. 세계사의 유례가 없는 ‘장수 혁명’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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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영학 교수

시민의 건강한 삶과 수명은 개인적인 노력으로 가능하지만, 사회적으로는 의료보험제도가 결정한다. 코로나19라는 새로운 위협이 지구촌을 덮쳤다. 우리의 의료보험제도도 팬데믹시대에 맞춰 개선할 점은 없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울러 코로나 바이러스와 싸우는 의료인과 방역당국의 노고에 감사한다. 참, 필자의 친구는 이번 겨울에도 치료하러 한국에 온다고 했다.

변영학<대구가톨릭대 정치외교학과/군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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