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노태우 전 대통령, 영욕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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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전 대통령이 1988년 6월 청와대에서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국제올림픽위원장을 접견하는 모습. 연합뉴스 자료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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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5월 제1차 남북총리회담에 참석한 북한 연형묵 총리를 청와대에서 접견하는 노태우 전 대통령. 연합뉴스 |
고(故)노태우 전 대통령이 26일 영욕의 삶을 마감했다. 노 전 대통령의 사망으로 '1노 3김'(노태우·김대중·김영삼·김종필)으로 상징되는 현대 정치사도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노 전 대통령은 6·29 민주화 선언과 대통령 재임 시절 북방·통일정책, 5공 청문회 개최 등 긍정 평가와 군사 반란 및 광주항쟁 주범이란 오명을 동시에 받고 있다. 퇴임 뒤에는 비자금으로 옥살이를 하고 서훈 박탈, 지병으로인한 오랜 투병생활 등 노후가 편치 않았다.
◆ 보통사람 노태우
노 전 대통령은 1932년 12월 6일 팔공산 근처인 대구시 동구 신용동에서 노병수와 김태향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숙부(노병상) 밑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대구 공산국민학교와 경북고를 졸업한 뒤 육군사관학교(11기)에 진학했다. 1955년 2월 육사를 졸업하고 육군 소위로 임관했으며, 미국에 유학해 특수전학교 대인심리전 과정을 마친 뒤 귀국해 육사 11기가 주축인 '하나회'에 가입했다.
이후 군사정보대 영어번역 장교, 방첩부 방첩 과장을 거쳤고, 육군본부 방첩 과장으로 민심과 정치 동향을 수집했고, 공수특전여단장, 대통령 경호실 작전차장보를 지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피살되자 당시 전두환 국군보안사령관과 함께 12·12 군사 쿠데타로 실권을 장악했다. 광주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한 뒤 그해 8월 전두환 전 대통령이 체육관 선거로 대통령이 되자 국군보안사령관 자리를 물려받았다.
1981년 육군 대장으로 전역하고 민정당에 입당, 외교안보담당 정무제2장관, 체육부장관을 거쳐 내무부 장관, 서울올림픽대회 및 아시안게임 조직위원장을 역임하고 1985년 2·12 총선에서 전국구(비례대표) 의원으로 국회에 진출해 민정당 대표에 임명됐다. 1987년 6월 민주정의당(민정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어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한 '6·29선언'을 발표하며 정국을 대화합의 국면으로 전환 시켰다. 그해 12월 야권 후보 분열에 따른 '1노(盧)3김(金)' 구도를 이용해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후보를 누르고 제13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국가 경쟁력 향상
"이 사람 믿어주세요"라는 '보통사람 노태우'를 슬로건으로 직선제 대통령에 선출된 뒤 민주주의 정착과 외교적 지위 향상, 토지공개념 도입 등 경제 발전에 이바지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세계적 탈냉전 시대에 맞춰 정부 수립 이래 처음으로 공산권 국가와 정식 외교 관계를 맺는 등 대한민국의 외교 역량을 크게 향상시켰다.
노 전 대통령은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첫 남북 고위급 회담 성사, 남북 기본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 선언 채택 같은 남북관계 개선의 디딤돌도 쌓았다. 1988년 7월 '민족자존과 통일 번영을 위한 대통령 특별선언'(7·7선언)을 발표하고, 이후 공산권 국가와 수교를 추진했다. 1989년 2월 헝가리를 시작으로 폴란드, 유고슬라비아, 체코슬로바키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알바니아 등 동유럽 7개국과 외교 관계를 맺었다. 1990년 9월과 1992년 8월에는 소련, 중국과도 국교를 정상화했다.
1989년 9월 첫 남북 고위급 회담을 성사시킨 노 전 대통령은 1991년 말 남북화해와 불가침을 선언한 남북 기본합의서 채택과 비핵화 공동선언이라는 결실을 이뤘다. 1989년 10월 당시 강영훈 국무총리가 평양을 찾아 김일성 주석을 만나는 등 남·북 총리는 8차례 서울·평양을 오가며 남북 기본합의서를 탄생시켰고, 이는 지금도 남북관계를 규율하는 기본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은 자율화·개방화에 역점을 둔 경제 정책을 통해 대규모 주택 공급으로 부동산 시장을 안정시켰다. 소득 증가와 부동산 투기 등으로 주택난이 심화하자 분당·일산·평촌·중동·산본에 29만2천호 물량의 1기 신도시를 건설하는 등 총 200만 호 주택공급을 지휘했다. 서해안고속도로와 경부고속철도 계획을 수립해 KTX의 첫발을 뗐고, 영종도 신국제공항을 기공하는 등 기반시설 구축에도 박차를 가했다.
◆암울했던 말년
이 같은 외교·경제 분야 성과에도 불구, 1986년부터 1988년까지 이어진 '3저(저환율·저유가·저금리) 호황' 퇴조 이후에도 고성장 유지 정책을 밀어붙이면서 국제수지 악화, 인플레이션 심화 등으로 경제 불안을 초래했다는 평가도 받는다. 노 전 대통령은 결단력이 부족하다는 비판 속에 임기 중반부터 레임덕에 빠져 통치행위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때문에 '물태우'라는 달갑잖은 별명을 얻기도 했다.
특히 노 전 대통령은 군사 쿠데타의 주도 세력이자, 5·18 가해자라는 꼬리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퇴임 후 노 전 대통령은 12·12 주도, 5·18 광주 민주화운동 무력 진압, 수천억 원 규모의 비자금 조성 등의 혐의로 전두환과 함께 수감됐고 법원에서 징역 17년형과 추징금 2천600억여 원을 선고받았다. 또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이었던 노 전 대통령은 당시 보안사령관 겸 중앙정보부장 서리였던 전두환 전 대통령과 함께 '5·18 무력 진압의 주범'이란 오명을 평생 안고 살아야 했다.
1997년 12월 퇴임을 앞둔 김영삼 대통령의 특별사면 조치로 석방됐지만, 오랫동안 추징금 미납 논란에 시달리다가 지난 2013년 9월에야 뒤늦게 완납했다. 여전히 5·18에 대한 사과와 추징금 환수를 거부하고 있는 전두환의 행보와 구분되는 지점이다.
노 전 대통령은 퇴임 후 암울한 말년을 맞는다. 2002년부터 건강이 크게 악화되면서 사실상 10여 년간 칩거 생활을 해왔다. 여기에다 5월 단체 등 광주 시민사회는 노 전 대통령이 5·18 학살 책임에 대해 직접 사죄하지 않은 점을 들어 국립묘지 안장에 반대입장을 밝히고 있다.
박철언 전 장관(노태우 전 대통령의 손아래 고종사촌 처남)은 영남일보와의 통화에서 "노태우 대통령께서는 산업화에서 민주화로 가는 중간 역할을 훌륭히 해내셨다. 6.29선언을 통해 대한민국의 민주화 대장정을 출발시키셨고, 대통령 당선 후 헌법재판소 신설, 지방자치 부활, 언론기본법 폐지 등 국민의 기본권 신장을 위해 노력하셨다"고 평가했다.
임호기자 tiger35@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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