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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실상 대구에 알린 '두레 사건' 관련자들 5월18일에 '무죄'

2022-05-19

당시 유인물 배포하다 계엄군에 잡혀 고문

5·18 실상 대구에 알린 두레 사건 관련자들  5월18일에 무죄
42년이 지난 5월 18일, 죄를 벗은 대구 '두레사건' 관련자들이 선고 직후 입장을 밝히고 있다.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의 상황을 대구에 알리려다 계엄군에게 붙잡혀 고문을 당하고 유죄를 선고받았던 대구 청년(영남일보 4월 21일 9면 보도) 5명이 42년이 지난 2022년 5월 18일, 죄를 벗었다.

이날 오후 대구지법 형사11부(부장판사 이상오)는 일명 '두레사건' 관련자 5명에 대한 재심에서 이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이 시작되면서 대구지역에서도 두레양서조합원을 중심으로 광주 실상을 제대로 알리고 광주지역 뜻에 동참하며 군사정권에 항거하기 위해 준비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들은 대구 동성로에서 '민주시민에게 고함'이라는 유인물을 살포하기도 했다. 수차례 대책협의가 이뤄졌지만 1980년 5월27일 광주 민주화운동이 종료되면서, 이들이 제작한 유인물을 소각됐고 조합은 해산됐다.

당시 합동수사본부는 1980년 6월 말부터 두레사건의 배후 수사를 진행했으며, 이는 같은 해 9월 11일 표면화 됐다. 이에 따라 이 사건 관련인들은 경북대 후문 두레서점 등지에서 사복경찰에 의해 불법 연행돼 대구 시내 대공분실 등에 구금됐다.

결국, 이 사건은 같은 해 10월6일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과 김수환 추기경의 회담을 통해 최종 정리됐다. 하지만 그동안 수많은 사람이 연루돼 불법 구금됐고, 고문 속에 수사를 받았다. 석방 또는 불구속 입건 처리된 이들도 있었지만, 반공법 또는 계엄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이들도 있었다.

고(故) 정상용씨의 처와 서원배·신중섭·이동렬·이상국씨는 2020년 7월, 대구지법에 재심을 청구했다. 정씨는 1980년 서울고법에서 징역 1년을 확정받았고, 나머지 이들은 1980년 경북지구 계엄보통군법회의로부터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정씨는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하는 행위를 했다'는 반공법 위반 혐의와 '대구 일원에서 광주 5·18항쟁과 관련해 공수부대가 민간인을 학살했다는 유언비어를 날조·유포했다'는 계엄법 위반 혐의를 모두 받았다. 서씨 등 4명은 계엄법 위반 혐의로 기소됐다.

이날 재판부는 "계엄포고 당시 국내 정치상황과 사회상황이 '군사상 필요할 때'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 또 죄형법정주의의 명확성 원칙, 영장주의 원칙에 위배되며, 언론·출판과 집회·결사의 자유, 학문의 자유 등을 침해한다"며 "계엄포고가 당초부터 위헌·위법해 무효이므로, 공소사실 중 계엄법 위반의 점은 '범죄로 되지 아니하는 때'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이어 "반공법 위반 혐의의 경우, 검사는 '증명할 증거가 없다'고 진술했고, 이에 따라 무죄를 구형했다"며 "피고인들은 각 무죄"라고 말했다.

이상오 재판장은 "오늘 광주 5·18 기념식에서 대통령이 이야기했듯, (5·18은) 아직 살아있는 역사이고, 현재도 진행 중인 역사다. 앞으로도 5월 정신을 확고히 지켜가겠다는 취지로 (대통령도) 말했다"며 "앞으로 자유민주주의 또는 인권과 관련해 하나의 이념이 될 법한 사례다. 역사의 과정에서 피고인들이 안타깝게 재판을 받았던 점은 유감으로 생각한다. 형사보상 청구를 통해 조금이나마 위로를 받길 바란다"고 전했다.

42년 만에 죄를 벗은 서씨는 "오늘은 후배들에게 고생시킨 내가 빚을 다 갚은 날"이라며 "광주의 슬픔과 아픔은 광주만의 것이 아니다. 대구에서도 함께 하려고 했던 사람들이 77명이며, 두레 사건 관련 유공자만 14명이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이어 "대구에서 5·18 유공자로서 살아가는 것은 엄청나게 힘들었다. 떳떳하지 못한 삶 중 하나일 수도 있다"며 "앞으로는 그런 세상이 바뀌었으면 한다. 대구경북에서도 광주의 아픔을 같이 감내해주고 이해해주기를 부탁한다.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가장 먼저 끌고 올라갔던 2·28이 존재하는 곳이 대구 아닌가"라고 했다.

다른 이들도 "그 당시 우리는 모두 20대 청춘들이었다. 당시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한 것에 대해 후회는 하지 않았지만, 폐쇄된 지역사회에서 '빨갱이'라는 누명을 쓰고 고통받은 세월이 30여 년이다", "역사적으로 같은 일이 다시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며, 오늘 광주 영령들 앞에서 정치인이 선언한 그 말이 말로 끝나지 않고, 행동으로 삶으로 실천되기를 바란다" 등의 의견을 말했다.


글·사진=서민지기자 mjs858@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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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부 서민지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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