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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재로 전소된 광산문학연구소, 작가 이문열의 작품연구와 문학도 양성 공간

2022-07-01 19:12
광산문학연구소
문학도들이 광산문학연구소에서 이문열의 직품세계를 연구하고 있다.<영양군 제공>
광산문학연구소
올해 초 광산문학연구소 내에 진달래 꽃이 활짝핀 모습. <영양군 제공>


소설가 이문열의 작품에 대한 연구와 문학도를 양성하기 위해 지어진 '광산문학연구소'가 한밤중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이 나 한옥 양식의 목조건물 5동(418㎡)이 전소됐다.

목조 건물로 다행히 인명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지만 화재의 정확한 원인을 찾지 못해 주민은 물론 문학도들의 애간장을 태우고 있다.

광산문학연구소 2001년 5월 12일 한국현대문학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와 문학도 양성을 위해 설립된 문학연구소이다. 이문열 작가의 자비로 설립된 문학연구소는 영양군 석보면 두들마을에 위치해 연구소 내에는 학사·강당·사랑채·서재·대청·식당·정자 등이 '□'자로 들어서 있다.

이문열 작가가 "이곳을 그냥 개인 창작실이고 개인 서재고 후배를 위한 소설 사랑방 같은 공간"이라고 이야기할 만큼 문학도 양성에 심혈을 기울이던 공간이다.

건축된 지 21년 동안 이곳에서는 세미나와 학술토론회, 문학캠프, 작가와의 만남 등 다양한 문학 관련 행사가 왕성하게 열렸다. 또 청록파 시인 조지훈 생가(일월면 주실마을)과 오일도 생가(영양읍 감천마을) 등과 함께 영양군이 주변관광지와 문학을 연계한 테마관광 자원으로 활용했다. 이번 화재로 인한 상처로 아쉬움이 더욱 크다.

이 작가는 이곳에서 태어나지는 않았다. 갓난아기 때인 1950년부터 햇수로 3년, 그리고 10대 시절인 1962년부터 햇수로 2년이 다만 짧은 거주를 했다. 그러나 그의 소설 곳곳에서 비장하리만치 깊은 자부심으로 묘사되는 '두들마을'은 그에게 언제나 고향이었다.

두들마을을 개척한 이는 '석계 이시명' 선생이다. 선생은 인조 18년인 1640년 병자호란의 국치를 부끄럽게 여겨 이곳으로 들어왔다. 선생의 부인은 안동 장씨 '장계향'이다. 그녀는 최초의 한글 조리서인 '음식디미방'을 집필한 여중군자로 이름 높다. 이문열 작가 소설 '선택'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석계 부부는 이곳에 터를 잡으면서 도토리를 얻을 수 있는 상수리나무를 많이 심었다고 한다. 그리고 왜란과 호란으로 궁핍해진 이웃에게 도토리 죽을 끓여 나누었다고 전한다. 두들마을에는 지금도 상수리나무가 많다. 수령 370년이 넘는 고목은 모두 50여 그루에 이른다. 광산연구소의 동쪽에는 정부인 장씨 예절관과 전시관이 있고, 남쪽에는 음식디미방 교육관과 체험관, 정부인장씨유적비 등이 있다. 정부인 장씨의 유산은 마을에서 가장 넓게 자리한다.

이문열 소설가가 두들마을에 서재이자 집필실이고 사랑방인 새로운 거처를 마련한 이유도 여기에서 엿 볼 수 있다.

이곳 두들마을은 그의 소설 '선택'의 직접적인 배경 장소이며, '그해 겨울',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 '금시조', '황제를 위하여'등 많은 작품 속 인물들의 삶의 역정이 펼쳐지던 무대이기도 하다.

그의 현재 경기도 이천의 '부아악산(負兒岳山)'에 터를 잡고 이곳에서 작가지망생과 문학연구자, 국내외 번역가 등과 머물며 문학 활동을 하고 있다. 또 수시로 광산문학연구소에 내려와 문학 활동을 펼쳤다.배운철기자 baeuc@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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