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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生劇場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죽궁 명인 월재 김병연(1)..."내 제2삶의 화두는 '죽궁의 도시 대구' 만드는 것"

2022-08-19

이성계·이순신…예부터 활 잘 쏘는 '동이족'
어릴 적 부친이 만들어준 활이 최고의 장난감
신토불이 활 재현이 운명이라 생각 '장인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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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구벌 죽궁 명장인 김병연. 그는 한국 고유의 활이랄 수 있는 각궁의 기능을 전승한 나전칠기를 이용한 나전죽궁을 국제 무대에 선보여 '한국의 창조적인 장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2006년부터 죽궁 제작자의 삶을 살기로 한 그는 한때 팔공산 죽궁 공방 전소로 망연자실했지만 주위의 도움으로 재기를 했다.

활(弓). 펼치면 하나(一)로 화평하게 열리지만 힘과 힘이 갈등을 빚어 서로의 명줄을 겨누기 시작하면 생사(生死)를 가를 수 있는 변화난측한 파워를 뿜어내게 된다.

대나무, 물푸레나무, 소의 뿔과 힘줄 그리고 민어의 부레풀 등이 햇살과 바람 그리고 화기(火氣)가 한데 뭉쳐져 가공할 만한 장력을 얻게 된다. 아주 오래전, 활은 단순한 무기가 아니었다. '수신(修身)'의 수단으로 진화를 하게 된다. 궁사는 단순히 물리력만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체력으로는 '무관', 맘으로는 '문관'의 혜안을 겸비해야만 했다. 활은 문무(文武)를 하나로 묶어 주었다. 활은 그 시절, 최첨단 미사일이었다. 칼보다 더 치명적이었다. 모든 장수에게는 필살기 무기였다. 이성계, 이순신…. 누대에 걸쳐 명궁과 신궁이 속출하고 그 용담(勇談)은 인구에 회자된다. 세종실록에도 '열 살 이상의 남자들은 항상 활을 가까이하여라'란 구절이 있다. 활을 잘 쏘는 민족, 우리 한민족은 '동이족(東夷族)'으로 불렸다.

총이 등장하면서 활의 용처도 급락할 수밖에 없었다. 총이 활의 기세를 압도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활의 위상이 크게 변한 건 아니었다. 활과 총은 핵폭탄과 각종 폭탄이 등장하면서 역사의 후면으로 사라지고 이제는 하나의 스포츠 종목으로 진화를 했다. 어느 날부터 활이라 하면 '묻지 마 양궁'이었다. 양궁이 대한민국의 모든 활의 역사를 대변하는 건 아니다. 우리는 양궁만으로 다 설명할 수 없는 활의 유구한 전통과 비술(秘術)을 간직한 나라였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를 넘어오면서 그 명맥은 거의 사라져버린다.

나는 달구벌의 죽궁 명인인 월재(越才) 김병연이다. 방랑시인 김삿갓과 동명이다. 그래서 그런지 내 인생은 늘 '유빙(流氷)'처럼 떠돌았다. 뭔가 될 듯한 대사(大事)도 한순간에 폭락해 버렸다. '한숨 반, 눈물 반'으로 얼룩졌다. 어머니는 히로시마 원폭 피해자였다. 46세 때 나를 낳았다. 한 작명가가 병연이란 이름이 별로라고 귀띔했다. 그가 내민 이름은 김병수였다. 모친이 돌아갈 때까지 난 김병수로 살았다. 14년 전 법원에 가서 개명 절차를 거쳤다.

내 몸속에는 상당한 수준의 기계공학 기술을 갖고 있었던 아버지의 유전자가 스며들어 가 있다. 1940년대 후반, 대구에서는 처음으로 선반 등 기계를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신생공업사' 공장장이 된다. 호경기 때는 거느린 직원만 800여 명. 아버지는 쇳덩어리로 못 만드는 게 없었다. '미다스의 손'이었다. 일본에서 귀국할 때 일본 현지에서 자신이 사용하던 고급 연장을 갖고 들어왔다. 그 무렵 한국은 농업사회였다. 2차 산업 인프라는 전무한 상태였다. 아버지의 탁월한 기술력은 자연 타인의 부러움을 살 수밖에 없었다. 국내 선반 기술자 1호랄 수 있는 아버지는 60년대 이미 자동화 시스템을 생각했다. 최강 공구 거리인 북성로의 오늘을 있게 한 재원이었다. 공업사 한쪽에 용광로까지 구비 해 놓았다. 그걸 이용해 선철, 단조, 철판 등 다양한 철물을 만들 수 있었다. 아버지는 거기서 파생된 침산동 대광공업사, 원대동 고려산업사 등에도 간여를 한다. 그 기술력 때문에 자동 볏짚 절단기, 심지어 국내 첫 냉동탑까지 제작하게 된다.

아버지는 틈틈이 나를 위해 활을 만들어주었다. 그 활은 내겐 최고의 장난감이었다. 툭하면 골목에서 활쏘기 놀이를 했다. 하지만 나는 생업 때문에 오래 활을 잊고 살았다. 그런데 2006년 시작된 MBC 인기드라마 '주몽'이 날 일깨운다. 골목마다 '내가 주몽'이라고 외쳐대는 개구쟁이들이 폭증한다. 하루는 아들이 나더러 활을 만들어 달라고 했다. 갑자기 예전 내게 활을 만들어 주던 그 아버지가 생각났다. 갑자기 식은땀이 흘렀다. 한 방 얻어맞은 것 같았다. 누군가가 내게 '병연아, 너 지금 뭘 하느냐'고 선몽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활 명인을 수소문했다. 달서구에서 주모 명인을 어렵게 만날 수 있었다.
글·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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