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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역사의 중심에 선 예천人 .4] 이찬·김영인 부부…임금 고친 뛰어난 의술로 고향의 病者도 가리지 않고 보살펴

2022-11-07

인조 병환에 사임한 이찬 다시 불러
멀리 떨어진 남편 그리워하고 응원
부인이 쓴 애틋한 편지 소중히 간직
고향 백성 치료도 헌신…존경 받아
멀리 떨어진 병자도 한달음에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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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예천군 용궁면 무이2리 국창 이찬의 생가터에는 현재 종손인 이기동씨가 집을 지어 살고 있다. 이찬은 이곳 고향에서 예천 백성들을 위해 의술을 펼치고 후학을 양성했다.

학식이 뛰어난 것만이 아니라 의술에도 일가견이 있어 임금의 병환도 낫게 했던 이찬이었다. 그러나 그의 의술은 임금에게만 머물지 않고 고향 예천의 지역민에게도 펼쳐졌다. 바쁜 국정으로 홀로 떨어져 있던 그의 아내 김영인은 시로써 남편을 그리워하고 응원했다.

#붉은 끈으로 이어진 인연

1644년(인조 22) 2월이었다. 영의정 심열, 좌의정 김자점, 우의정 이경여, 삼정승이 대전에 섰다.

"옥후(玉候·임금의 건강 상태)가 미령하시어 오랫동안 회복되지 않으시니 걱정과 황급함이 실로 큽니다. 항간에서 명의로 검증된 이찬을 불러들여 증세에 맞는 약재를 의논해 정하도록 하소서."

"이찬의 의술이야 내 익히 안다. 8년 전에도 도움을 받았거늘. 그리하라."

8년 전이란 어의의 치료에도 효험을 얻지 못한 인조의 병을 국창(菊窓) 이찬(李燦·1575~1654)이 고친 일을 일렀다. 당시 왕은 특명을 내려 이찬을 익위사사어(翊衛司司禦·종오품)로 등용해 고마움을 표했다. 이후 이찬은 종부시주부(宗簿侍主簿)·공조좌랑·군위현감을 역임하다가 건강을 위해 사임한 후 의술에만 집중한 터였다. 그런데 임금이 다시 찾은 것이다.

대전을 빠져나간 어명이 궐문을 넘어 이찬에게 닿았다. 명을 받잡은 이찬에게 두 마음이 일었다. 앓는 군주에 대한 염려와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은 데 대한 자부심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찬은 서애 류성룡의 생질로 문인임에도 불구하고 의술로 더 유명했던 것이다.

임금의 부름에 서둘러 입궐 준비를 하며 이찬은 고향 예천 용궁 무리실(현재 무이2리)에 두고 온 아내를 떠올렸다. 아내 김영인은 학자 설월당(雪月堂) 김부륜(金富倫)의 딸이자 계암(溪巖) 김령(金 ·1577~1641)의 누이로 나무랄 데가 없는 여인이었다. 총명하고 문사에 능하며 행실까지 아름다워 이찬이 무척이나 사랑했다.

이찬이 서안의 서랍을 열어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아내의 편지를 꺼냈다. 맨 위의 '寄遠(기원)' 두 글자부터가 이미 애틋했다.

寄遠

멀리 부칩니다

生來人間赤繩纏/ 一朝相別兩可憐/ 天寒旅舍伺如在/ 寂寞空閨獨不眠.

세상에 태어나 적승의 연을 이었는데/ 하루아침에 이별이라니 마주 보고 그저 웁니다/ 추운 날 객지에서 어찌 지내시는지요/ 고독한 규방에서 홀로 잠 못 이룹니다.

적승은 부부의 인연을 가리키는 표현이었다. 사연인즉슨, 당나라 때 위고(韋固)라는 청년이 여행 중에 허난성의 송성(宋城)이란 곳을 지나다가 한 노인을 만났다. 달빛 아래 신비로운 분위기에 이끌려 대화를 나누게 되었는데, 노인의 주머니에 적승(赤繩), 즉 붉은 끈이 비어져 나와 있었다. 위고가 그게 무어냐고 묻자 노인이 "이 끈으로 사내와 여인의 발을 묶으면 부부가 된다네. 두 사람이 원수지간이든 이역만리에 떨어져 있든 바꿀 수가 없지" 하고 대답했다. 그러곤 위고의 배필이 누구인지 알려주었다. 부부를 맺어주는 월하노인(月下老人)의 기원이었다. 한마디로 이찬과 김영인은 하늘이 맺어준 사이라는 뜻이었다.

이찬이 다른 편지를 펼쳤다.

有約重相見/ 如何久不來/ 梨花萬庭落/ 春鳥數聲哀.

만나자 거듭 약속해 놓고선/ 어이하여 이리도 오지를 않으시나요/ 배꽃은 뜰 가득히 지고/봄 새 몇 마리가 슬피 우네요.

이찬은 몇 번이나 읽은 후 고이 접어 서안에 올렸다. 그리고 지필묵을 챙겨 앉았다. 기쁜 소식이 생겼으니 아내에게 알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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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찬이 자형인 청풍자 정윤목 대감과 후학들을 양성한 것으로 전해지는 삼강서원은 현재 사라지고 터만 남아 있다.

#예천을 살핀 의술

이찬은 집안에서 따로 가르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뛰어난 수재였다. 의술만 해도 독학으로 명의의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 식견을 알 만했다. 성품도 남달랐다. 남의 선행을 보면 아낌없이 칭찬하는 반면 허물은 결코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옳고 그름에 관련된 문제는 절대로 타협하지 않았다. 누구든 찾아와 배움을 청하면 귀찮은 기색 없이 정성껏 가르쳤다.

특히 이찬은 그가 가진 의술을 베푸는 데도 사람을 가리지 않았다. 사실 이찬이 살았던 조선시대에는 어지간히 큰 지역이 아니면 의료의 혜택을 누리기가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중앙에야 내의원·전의감·혜민서·활인서 등의 의료기구가 설치돼 있었지만 지방민을 위한 제도적인 기초는 미비했다. 소수의 의료인에게 의지해야 하는 데다 그마저도 일반 백성에게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런 시기에 이찬은 임금도 고친 뛰어난 의술로 자신의 고향에 머무를 때는 한결같이 아픈 예천 백성을 살폈다. 그것도 소외당하는 주민이 생기지 않도록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거리의 멀고 가까움을 가리지 않고 한달음에 병자를 찾아갔다고 한다. 이찬은 예천 백성들에게 당연히 존경과 공경을 받았고 김영인이 그의 남편을 바라보는 것도 같은 마음이었다. 또한 이찬은 그의 자형인 청풍자 정윤목 대감과 함께 삼강서당에서 후학들을 양성했다.

그러나 중앙과 지방의 관직을 아우르느라 예천에 머물 새가 없는 남편이었다. 임지에 동행하기도 하지만 떨어져 지낼 때는 그리움이 뼈에 사무쳤다. 마치 답 쌓인 구름과 첩첩인 산이 남편의 귀향을 막는 것만 같았다.

別後愁誰語/ 路遠音信難/ 好還知何日/ 西望隔雲山.

이별의 수심을 뉘에게 이르랴/ 길이 멀어 소식 닿기 어렵구나/ 좋은 시절 얼마런가/ 서쪽이 구름과 산으로 막혀 있구나.

사랑하는 사람만 곁에 있어 준다면 바랄 것이 없는 환경이었지만 김영인은 남편의 큰 뜻을 받드는 데 소홀히 하지 않고, 남편을 지지했다. 이찬도 그런 아내의 마음을 고마워했다.

어느 날 몸종이 환한 얼굴로 뛰어 들어왔다.

"마님, 나리께서 편지를 보내오셨습니다." 김영인이 반색해 받아들었다. 떨리는 손으로 뜯어 한 글자, 한 글자 따라가자니 목이 메었다. 남편의 애정 깃든 편지에 김영인은 넘치는 마음을 바로 종이에 옮겼다.

書札自何處/ 開緘感歎長/ 相思無限意/ 此日更難忘.

어디선가 날아든 편지/ 뜯어보고 감격하였어요/ 임을 그리는 마음이/ 오늘도 가시지를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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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군 풍양면 청운리에 자리한 국창 이찬의 묘소.

#부부가 한 책으로 전해지다

김영인의 시를 이찬은 진심으로 아꼈다. 친정 동생을 생각하며 지은 시는 함께 안타까워하며 읽었고, 조카의 부음을 듣고 지은 시를 본 날은 남몰래 눈물도 지었다. 자신을 향한 애절한 마음이 담긴 시는 두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의 가슴을 미어지게 한 시는 따로 있었다.

臥病深房日已久 / 精神氣力漸消然 / 平生辛苦寧容設 / 命在今朝更可憐.

깊은 방에 누워 앓은 지 오래라/ 정신과 기력이 점점 쇠약해지는구나/ 평생의 고생을 어찌 다 말할꼬/ 실오라기 같은 목숨이 참으로 가련하구나.

이찬은 흰머리도 나기 전에 병이 들어버린 아내의 곁을 든든하게 지켰다. 그리고 자신이 죽는 순간까지도 그녀가 지은 시를 소중하게 보관했다.

그로부터 200년 하고도 40여 년이 더 흐른 1895년(고종 32), 7세손인 이기락(李基洛)이 이찬과 김영인의 글을 꼼꼼하게 정리했다. 우선 이찬이 남긴 것으로는 시·편지·제문·만시 등이 있었다. 눈에 띄는 것은 처남 김령에게 보낸 4편의 편지 '여김계암서(與金溪巖書)'였다. 김령은 임진왜란 때 17세의 나이로 자진 종군하고, 명나라의 총병사 오유충과 유격장 노득공으로부터 후한 대접을 받았을 정도로 학식이 숙성한 인물이었다. 김영인의 동생다웠다. 그리고 이찬이 모아둔 김영인의 작품으로는 시 44수와 차운시 11수가 있었다. 이기락은 이 전부를 갈무리해 편집한 뒤 손자에게 간행을 당부했다.

뜻을 받은 9세손 이준구(李駿九)·이우구(李宇九) 형제와 10세손 이동욱(李東郁)은 3년 후인 1898년(고종 35)에 드디어 '국창집(菊窓集)'을 세상에 펴냈다. 김영인의 작품은 '국창선조비영인광주김씨일고(菊窓先祖

令人光州金氏逸稿)'라는 이름을 달고 합간되었다. '용산문집(龍山文集)'의 저자 이만인(李晩寅)의 서문이 권두에 실리고, '시려집(是廬集)'의 저자 황난선(黃蘭善)의 발문이 권말에 실렸다. 이때 황난선이 김영인의 시를 일러 이렇게 예찬했다.

"음조는 온화하고 부드러우며, 격률은 맑고 곱고 담박하다."

김영인의 성품이 그러했고 김영인·이찬 부부의 금실이 그러했으며 예천에서의 삶이 또 그러했다.

글=김진규〈소설가·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공동기획:예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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