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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스토리가 있는 청도 힐링 여행 .3] 화양읍 도주관로, 성내 걷든 성밖 배회하든…화양, 그 이름처럼 어디 가든 빛이 가득

2022-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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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때 처음 지은 것으로 알려진 청도읍성에 가면 담쟁이가 성벽을 기어오르고 성의 안팎으로 초목이 자라난 모습을 볼 수 있다. 어디로 걸음을 옮기든 머리 위에는 항상 빛이 가득해 가족들의 나들이 장소로도 인기를 모으고 있다.

화양(華陽)은 빛나는 양지.
역사가 기록된 이래
경부선 열차가 개통되기 전까지
화양은 청도의 중심이었다.

남쪽에는 청도군의 진산인 남산(南山)이
높이 솟아 양팔 벌려 화양 땅을 안고 있고
그 아래로는 청도천(淸道川)이
동류하며 넓은 들을 펼쳐 놓았다.

남산과 청도천 사이에는
청도읍성이 자리한다.
남산은 남쪽을 경계하고
청도천은 북쪽을 파수했다.

동·서·북문이 있었고
성안에는 민가와 함께
관아와 객사·군기고 등이 융성했다.

청도읍성은
조선시대 동래에서 한양으로 가는
주요 도로가 거쳐야 하는
8개 읍성 중 하나였고
길은 동문과 서문을 통과했다.
그 길의 이름은 오늘날 '도주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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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국의 마지막 왕이 피신했다는 골짜기인 남산계곡에서는 상류의 남산계곡주차장부터 계곡의 오솔길을 따라 오르는 계곡 트레킹을 즐길 수 있다.

◆청도읍성을 관통하는 도주관로

청려로 화양삼거리에서 청도읍성 방향으로 들어서면서 도주관로가 시작된다. 화양읍을 관통하는 큰길이다. 길을 따라 조금 오르면 양쪽으로 시원하게 뻗어 흐르는 청도읍성의 성벽이 보인다. 처음 성을 쌓은 것은 고려 때라 한다. 그때의 성은 돌과 흙을 섞어 쌓은 토성이었고 조선 선조 23년인 1590년에 왜란에 대비하라는 왕명에 의해 성은 돌로 다시 축조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성벽은 파괴되었고 동·서·북문이 소실되었다. 이후 수차례 개축하여 읍성을 유지했고 고종 7년인 1870년에는 남문을 건립하여 4대문을 갖추게 되었다.

청도읍성의 운명은 1905년 경부선철도가 건설되면서 변하게 된다. 철도는 읍성을 우회해 현재의 청도읍에 놓였지만 일제의 읍성 제거 정략은 집요했다. 읍성 내에 신작로를 개설한다는 명목으로 동문을 비롯한 성문과 성벽 일부를 헐었고, 도로의 변화와 함께 객사가 훼손되었다. 화양읍에 있던 관공서는 청도역 주변으로 옮겨졌고 상권의 중심도 청도장으로 옮겨갔다. 그러나 1960∼70년대만 해도 청도에서 "읍내 간다"고 하면 화양읍을 의미했다고 한다. 화양은 몸과 마음이 기억하는 청도의 중심이었다.

성벽 일부와 기저만이 남아 있던 청도읍성은 지금 북문인 공북루(拱北樓)와 서문인 무회루(撫懷樓) 그리고 동쪽·북쪽·서쪽 구간의 성벽 1천800m가 복원되어 있다. 남문지는 마을길이 나고 논을 일구면서 사라졌다. 그리고 동문인 봉일루(捧日樓)가 있던 자리에 도주관로가 놓여 있다.

도주(道州)는 고려 현종 1년인 1010년부터 근 100년간 청도를 부르던 이름이었고, 그 이름을 이어받은 도주관은 조선시대 청도군 객사의 이름이다. 객사는 왕을 상징하는 위패(位牌)를 모시고 지방 수령이 초하루와 보름에 배례(拜禮)하던 곳이자 청도를 찾는 관원이 머무는 곳이었다.

성안을 가로지르는 도주관로를 따라가면 화양우체국 지나 도주관의 긴 담이 나타난다. 도주관은 정당과 우익사만 남아 있었으나 현재는 복원되어 웅장한 모습이다. 건물 앞에는 대원군의 명으로 세워진 척화비가 서 있다. 도주관 뒤편의 화양초등에는 수령이 행정 실무를 보던 동헌 건물이 있다. 영조 13년인 1737년에 지어진 것으로 '주홀헌(주笏軒)'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임금을 알현하듯이 백성을 보살피겠다는 뜻이다.

도주관로에서 성벽 길에 오른다. 동문지에서 북문 지나 서문까지 읍성을 밟아본다. 성벽에는 치(雉)와 치성(雉城)이 설치되어 있다. 멀리까지 적의 동태를 살필 수 있는 구조물로 지금은 훌륭한 전망대 역할을 한다. 성벽 위에는 여장이 올라 있다. 가슴께에 닿는 높이와 두툼한 두께는 안정감을 주고 사각으로 뚫린 총안은 근사한 창이 된다. 북문과 서문은 옹성을 갖추었다.

성안에는 화양읍사무소가 자리하고 말을 징발하던 고마청과 남산에서 흘러내린 물을 가두어 읍성에 물을 공급하던 인공 연못 '성내지'가 있다. 성 밖에는 원형의 벽으로 둘러싸인 형옥이 있고 여름이면 1만 송이 수련이 피어나는 연못이 조성되어 있다. 복원 초기 단백석 같던 성벽에는 벌써 더께가 내려앉았다. 왕성한 담쟁이가 성벽을 기어오르고 성의 안팎으로 초목이 자라나 평화로운 숨결이 자욱하다. 성내를 거닐든, 성 밖을 배회하든, 성벽을 따라 전진하든, 어디로 걸음을 옮기든 머리 위에는 항상 빛이 가득하다. 화양, 빛나는 양지라는 그 이름처럼.

경부선 개통 이전 청도의 중심 '화양'
동~서 관통하는 큰길이던 '도주관로'
복원된 성벽 안팎 곳곳에 역사 흔적

성 밖에는 1만 송이 수련 피는 연못
이서국 왕이 피신했다는 남산계곡은
절경 가득해 계곡 트레킹 즐기는 곳
남산길 끝자락 신둔사 마애부도 2기
보주 있는 종형에 사리공 뚫어 특이


◆동천리와 교촌리를 잇는 동교길

동문 밖 도주관로에서 동쪽 성벽 곁으로 남산을 향해 오르는 길은 동교길이다. 화양읍성 동쪽에 개천을 끼고 있는 동천리(東川里)와 청도 향교가 있는 교촌리(校村里)를 잇는다. 동교길을 조금 오르면 왼편 구릉지에 청도 석빙고가 있다. 전국에 남아있는 6개의 석빙고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물 제323호다.

석빙고의 입구 왼쪽에 석비(石碑)가 서 있다. 거기에는 '5천451명의 막일꾼이 모두 하루씩 부역하였고, 607명의 승려가 돌을 날랐으며 12명의 석공, 3명의 야장 그리고 1명의 목수가 일했다. 양식쌀 53섬, 와공전(瓦工錢) 300냥, 시우쇠 1천438근, 회(灰) 384섬이 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 청도 석빙고는 동서로 긴 내부구조와 지상에 남북으로 걸쳐진 4개의 홍예보만 남아 있지만 천년이 지나도 제 모습일 것처럼 굳건해 보인다.

동교길을 조금 더 오르면 청도향교가 나타난다. 청도향교는 화양향교라 불리기도 하는데 조선 선조 1년인 1568년에 화양읍 고평동에 세웠던 것을 영조 10년인 1734년에 지금의 자리에 옮겨 지었다고 한다. 향교 내에는 사당 출입문인 내삼문, 사당인 대성전과 동무·서무·공부하는 곳인 명륜당과 동재·서재 등이 있으며 우묘좌당(右廟左堂)의 독특한 건물배치를 보인다. 향교가 있는 교촌리는 청도의 양반 터줏대감들의 동네로 명당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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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둔사에는 다른 사찰에서 보기 어려운 마애부도가 남아 있는데 보주가 있는 종모양이다. 명문 위쪽에 사각의 자그마한 구멍을 뚫어 사리공으로 삼았다.

◆화양남산길 따라 남산계곡으로

청도향교 앞 동교길에서 동천3길로 빠져나가면 화양남산길이 남산계곡으로 향한다. 화양남산길은 도주관로 초입에서 시작되어 동천을 따라 신둔사까지 이어지는데, 대부분의 사람은 상류의 남산계곡주차장에서부터 계곡의 오솔길을 따라 오르는 계곡을 즐긴다. 남산계곡은 이서국의 마지막 왕이 피신했다는 골짜기다. 또한 500년 전 무오사화 때 고을의 선비들이 모여 시회를 열며 음풍농월하던 곳이다. 계곡 곳곳의 절경마다 옛사람들이 남긴 각자를 만난다. 13곳이라고도 하고 16곳 혹은 19곳이 넘는다고도 한다.

안내판에는 음용지(飮龍池)·백석뢰(白石賴)·봉화취암(奉和醉巖)·취암(醉巖)·운금천(雲錦川)·질양석(叱羊石)·만옥대(萬玉臺)·연주단(聯珠湍)·석문(石門)·산수정(山水亭)·유하담(流霞潭)·일감당(一鑑塘)·낙안봉(落雁峯)·자시유인불상래(自是遊人不上來)·금사계(金沙界) 등 15개를 소개하고 있으나 계곡을 따라가다 보면 용항(龍亢)·옥정암(玉井巖) 등의 선경도 만날 수 있다.

'자시유인불상래'는 주자의 '무이구곡가' 중 제8곡의 마지막 시구를 빌려온 말로 '여기서부터 놀러 오는 사람은 올라오지 말라'는 뜻이다. '금사계'는 '관세음보살이 머무는 곳'을 나타내는 말이다. 관세음보살이 머무는 곳은 곧 화양남산길 끝에 자리한 신둔사(薪芚寺)다. 신둔사는 고려 명종 3년인 1173년에 보조국사 지눌(知訥)이 창건하고 봉림사(鳳林寺)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후 절의 자세한 역사는 알 수 없는데 현종 때인 1667년에 상견(尙堅)이 중창하였고 고종 때인 1878년에 중건하면서 절 이름을 지금의 신둔사로 바꾸었다고 전한다. 경내에는 영산보탑이라 불리는 5층 석탑이 있다. 그 옆에는 탑의 조성과 관련된 내용을 새긴 탑비가 있는데 1924년 3월1일 공사를 시작해 5월14일에 마쳤으며, 신도들의 헌금 800여 원을 들여 제작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둔사에는 다른 사찰에서 보기 힘든 마애부도 2기가 남아 있다. 부도는 요사채 뒤쪽 바위암벽에 10m가량 거리를 두고 새겨져 있는데 모두 보주(寶珠·불가에서 보배로 여기는 둥근 공 모양의 구슬)가 있는 종모양이다. 왼쪽의 것에는 '사리탑(舍利塔)'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오른쪽 것에는 '보현수이씨사리탑(普賢修李氏舍利塔)'이라는 명문과 함께 철종 3년인 1852년에 조성했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두 부도 모두 명문 위쪽에 사각의 자그마한 구멍을 뚫어 사리공으로 삼았다. 신둔사에서 동북쪽으로 뻗어 나간 능선에는 왕이 숨은 봉우리라는 은왕봉(隱王峰)이 있다. 이서국의 왕이 신라군을 피해 은신했다는 곳이다. 사람들은 신둔사가 이서국 왕실의 은신처와 관련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신둔사의 종소리가 은왕봉의 정령을 위로한다고 믿는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 참고=청도군지. 한국지명유래집. 한국학중앙연구원. 디지털청도문화대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공동기획 : 청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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