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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노벨문학상 산책] 가즈오 이시구로 '지난날의 잔재'...'달링턴 홀'에 바친 한 집사의 인생…그의 삶은 가치 있었을까

2023-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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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구로에게 부커상을 안겨준 이 소설의 원제는 'The Remains of the Day'이다. 송은경은 2009년 '남아 있는 나날'이라는 제목으로 국내 번역서를 발간하였다. 필자는 본 소설을 논의한 학술논문에서 과거를 회상하는 소설의 형식 및 자기기만과 성찰로 이어지는 과거에 대한 향수라는 소설의 정조에 주목하여 '지난날의 잔재'로 제목을 옮겼다. 이 글에서는 국내에서 출간된 역서의 제목으로 이시구로의 소설을 지칭하기로 한다.

부친 임종때도 주인 시중 들던 스티븐스
그의 기억 속 자랑스럽던 주인의 모습
6일간의 여행 통해 다시 돌아보게 돼
윤리적 정당성에 대한 깊은 성찰 돋보여

일본계 영국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인종·언어적 정체성 뛰어넘는 문체 '백미'

가즈오 이시구로(1954~)는 2017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일본계 영국 작가이다. 이시구로의 소설은 "위대한 정서적인 힘"으로 우리가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환상과 "그 아래의 심연을 드러낸다"고 당시 스웨덴 한림원은 선정 이유를 밝혔다. 1954년 일본 나가사키에서 태어났으나 1960년 가족과 함께 영국으로 이주했던 이시구로는 일본계 영국 작가라는 이국성으로 처음 주목받았으나 점차 인종적 정체성과 언어의 국지성을 넘어서는 글쓰기를 하는 작가로 세계 문학에 뚜렷한 족적을 남기고 있다. 1982년 첫 소설 '희미한 언덕 풍경(A Pale View of Hills)'부터 2021년 발간된 '클라라와 태양(Klara and the Sun)'에 이르기까지 이시구로는 폭력적인 역사와 불안정한 삶의 조건 앞에 선 개인이 감당해야 할 불안과 고통, 희망과 좌절, 우정과 사랑에 대해 삶의 조건을 수용하거나 이에 저항하는 선택에 대해 깊이 숙고한다. 대체로 간결하고 정돈된 문체를 구사하는 이시구로는 이러한 문체 아래 숨겨진 복잡하게 얽힌 감정의 타래를 탁월하게 펼쳐낸다.

일본계 영국 작가라는 특이한 이력에도 불구하고 이시구로는 "영국보다 더 영국적"인 소재를 다룬 그의 세 번째 소설 '남아 있는 나날(The Remains of the Day)'로 잘 알려져 있다. '남아 있는 나날'은 영국의 전통적인 장원저택 달링턴 홀을 배경으로 전형적인 영국 신사인 달링턴 경에게 헌신한 영국인 노집사 스티븐스의 회고록 형식을 띠고 있다. 1956년 7월로 설정된 프롤로그에서부터 달링턴 홀과 스티븐스는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을 맞이한다. 달링턴 경의 죽음 이후 달링턴 홀은 경매에 부쳐지고, 스티븐스는 부유한 미국인의 소유가 된 달링턴 홀에서 새 주인을 맞이하게 된다. 이후 소설은 새 주인의 권유로 6일간의 여행길에 오른 노집사의 여정을 따라간다. 스티븐스는 1930년대 초 달링턴 경의 친구에게서 물려받은 신사복을 여행 가방에 담고 역시 1930년대에 쓰인 여행 안내서를 들고 길을 떠난다. 1956년 달링턴 홀의 매각에서 암시되는 세계질서의 급격한 변화 속에 1930년대에서 멈춰버린 듯한 스티븐스의 모습은 그 자체로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면서도 역설적으로 시간의 흐름을 속절없이 드러낸다. 오래전에 결혼하며 달링턴 홀을 떠난 가정부 켄턴을 찾아가는 그의 여행은 곧 달링턴 경을 헌신적으로 섬겼던 자신의 삶을 반추하며 기억의 미로를 더듬어가는 여정이기도 하다.

"진정한 집사는 오로지 영국에만 존재하며 진정한 집사는 영국인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스티븐스는 집사의 '위대함'이란 '품위'를 잃지 않는 데에 있다고 믿는다. 어떤 상황에서도 감정을 절제하는 능력이 곧 품위라고 여기는 스티븐스는 평생 사적인 감정과 욕망을 억누르고 달링턴 경의 뜻을 살펴 시중을 듦으로써 진정한 집사라는 소명을 이루고자 했다. 스티븐스는 달링턴 경이 달링턴 홀에서 주최했던 1923년의 국제회담과 1930년대 비밀회담을 자신이 집사로서 위대함을 성취한 분수령이라고 회고한다. 이 두 회담에서 그는 삶의 사적 면모들과 감정을 철저하게 억제하고 주어진 직무에 헌신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전성기를 지난 부친이 달링턴 홀에 부집사로 부임 후 뇌졸중으로 쓰러져 임종을 맞는 순간에도 스티븐스는 국제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달링턴 경의 손발이 되어 활약한다. 부친의 임종을 지키는 대신 만찬 시중을 완벽하게 들었다고 칭찬 세례를 받았던 그날 저녁을 떠올리며 스티븐스는 "가슴 아픈 기억들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집사로서 위대함에 도달했다는 "뿌듯한 성취감"을 느꼈노라고 자부한다.

스티븐스의 성취감은 단순히 집사로서의 일상적인 직무를 다했다는 만족감에 기인하지 않는다. 그는 달링턴 경이 신사 중의 신사, "도덕적 의무에 대한 깊은 자각"을 가지고 있는 신사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스티븐스는 달링턴 경에게 헌신함으로써 그 자신도 올바른 역사의 흐름에 기여했다고 믿는다. 달링턴 홀에서 신사들의 시중을 들며 스티븐스는 "유럽 최고의 실력자들이 우리 대륙의 운명을 논"하는 자리에 자신이 함께 있었고 자신의 "직위에 상응하는 품위"를 지켜내면서 "세상의 저 위대한 중심축에 거의 도달했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과연 그러했을까?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패전국 독일에 취해진 베르사유 조약을 비신사적이라고 여긴 달링턴 경은 독일을 도울 방안을 찾고자 비공식적 국제회담을 개최했고, 이 회담의 여파로 히틀러의 외교사절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고 뉘른베르크 전당대회 무렵 독일 친화적인 외교 행보를 이어간다. 스티븐스의 기억 속에 달링턴 경은 유럽의 평화 유지라는 숭고한 목표를 이루고자 했던 진정한 영국 신사이지만, 훗날 달링턴 경은 나치의 협력자이자 꼭두각시로 전락했다는 불명예를 안게 된다.

스티븐스는 여행의 중반에 이르러 기억의 어지러운 미로를 헤쳐 나오면서 스스로 편치 않은 기억의 편린들을 발견한다. 영국 내 파시스트 정당과 친분을 맺은 달링턴 경이 두 명의 하녀를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해고했던 사건을 회고하면서 주인의 지시를 충실히 이행하기만 했던 자신과는 달리 그 부당함에 항의했던 켄턴을 떠올린다. 당시 켄턴이 불의에 분노를 느끼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자괴감에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스티븐스는 전혀 공감하지 못할 뿐 아니라 공감하려 애쓰지도 않는다. 이 일화는 스티븐스가 달링턴 경의 도덕적 우월성을 맹목적으로 추종하였음을 보여준다. 대신 스티븐스는 자신에게 마음을 여는 켄턴을 외면하고 그녀를 향하는 자신의 마음 또한 모른 체하며 기꺼이 자신의 감정을 희생하고 집사로서의 직무에 충실했을 때 삶의 의미를 찾고자 했다. 여행 초반 스티븐스는 달링턴 홀에서의 자신의 삶을 자부심과 만족감을 가지고 회고하지만, 차츰 그가 실현하고자 했던 삶의 공허함을 깨닫게 된다. 여행 마지막 날 켄턴을 마주한 후 스티븐스는 "인제 와서 뭘 숨기겠는가? 실제로 그 순간, 내 가슴은 갈기갈기 찢기고 있었다"고 고백한다. 또한 스티븐스는 바닷가의 어느 부두에서 처음 만난 낯선 이 앞에서 눈물을 터트리며 씁쓸하게 털어놓는다. "난 '믿었어요.' 나리의 지혜를. 그 긴 세월 그분을 모시면서 내가 뭔가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믿었지요. 나는 실수를 저질렀다는 말조차 할 수 없습니다." 여행의 끝에서 달링턴 홀에서의 자신의 삶에 대한 뼈아픈 자각을 얻은 스티븐스는 아이러니하게도 새로운 세계질서 속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자 떠나왔던 곳으로 되돌아간다.

'남아 있는 나날'을 통해 이시구로는 격변하는 역사의 회로에 매몰된 한 개인이 자신이 살아낸 삶의 윤리적 정당성에 대해 깊이 성찰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자신의 삶을 회고하는 스티븐스의 이야기는 의미를 드러내는 동시에 숨기는 언어의 긴장을 아슬아슬하게 유지한다. 굴절된 기억의 미로를 따라가는 스티븐스의 이야기에는 스스로에 대한 확신과 의심이 동시에 드러나고, 자기기만과 자기성찰의 순간들이 교차한다. 역사의 흐름을 벗어나 거리 두기를 할 수 없다는 면에서 우리 모두가 스티븐스와 같은 집사라고 말하는 이시구로는 역사의 무게를 직시하고 그 시공간이 제시한 삶의 조건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인물의 복잡한 심리를 섬세하고도 예리하게 펼쳐낸다.

김영주 <서강대 영미어문전공 교수>
공동기획:경북대학교 인문학술원 HK+사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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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주 교수 (서강대 영미어문전공)

김영주 교수는?


서강대 영문학부 영미어문전공 교수로 20세기 영국 소설 및 여성문학 등을 가르치고 있다. 연세대 영어영문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텍사스A&M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요 논문으로 '영국 소설에 나타난 문화지리학적 상상력: 가즈오 이시구로의 '지난날의 잔재'와 그레이엄 스위프트의 '워터랜드'를 중심으로' ''가슴속의 이 빛이': 버지니아 울프와 고딕미학의 현대적 변용' '잔혹과 매혹의 상상력: 안젤라 카터의 동화 다시 쓰기' 등이 있으며, 지은 책으로 '영국문학의 아이콘: 영국신사와 영국성' '20세기 영국 소설의 이해 II'(공저), '여성의 몸: 시각, 쟁점, 역사'(공저), '영미문화를 읽는 세 가지 키워드 : 공간·윤리·권력'(공저) 등이 있다. 역서로 버지니아 울프의 '세월'이 있으며, 한국버지니아울프학회와 함께 울프의 단편과 에세이 공동번역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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