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의 농담을 잘 우려낸 산수화 '설중귀려도'
두 그루 나무에 둘러싸인 아늑한 주막도 눈길
대나무에 내려앉은 소담스러운 흰 눈 '설죽'
추위 맞선 대나무 강인함에 따스함까지 스며
설경 속에 더 빛나는 우정 그려낸 '설중방우도'
친구와 서재에 마주앉아 풍경 보며 정담 나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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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석 '설중방우도'(종이에 옅은 색, 115.0×57.0cm, 개인 소장) |
흰 꽃가루가 분분하다. 사방으로 휘날리다가 서로 부딪치며 흩어진다. 베란다 창틀과 나무, 사람들의 어깨 위로 소복이 내려앉는다. 대구에서 내리는 첫눈이다. 고층에 자리한 우리 집 큰 창을 사정없이 두드리는 눈들의 반란을 감상한다. 눈은 아래로만 조용히 내리는 줄 알았다. 자세히 보니 아수라장이 따로 없다. 흰 세상은 가볍게 오는 것이 아니라 혼신의 힘으로 오고 있었다. 눈을 즐기기 위해 무장을 하고 집을 나선다.
◆날은 어둡고 갈 길은 멀어
연담(蓮潭) 김명국(金明國·1600~?)의 '설중귀려도(雪中歸驢圖)'에 나오는 선비가 되어 천을산으로 향한다. '설중귀려도'는 어둑어둑 해가 저물고 눈발도 끊이질 않는데, 선비가 나귀를 타고 길을 떠나는 작품이다. 눈을 맞으며 어디론가 향하는 선비의 몸짓이 설레어 보인다. 눈 덮인 산을 밟는 나도 덩달아 가슴이 뛴다.
김명국은 도화서(圖畵署) 화원으로 종 6품 교수(敎授)를 지냈다. 도화서는 조선 시대에 나라에서 필요로 하는 그림을 그리던 관청을 말한다. 그는 조선통신사의 수행 화원으로 1636년, 1643년 두 차례나 일본에 다녀왔다. '달마도'로 유명한 그는 신필(神筆)로 추앙받았다. 특히 선승화(禪僧畵)를 잘 그렸는데, 당시 일본에서도 선승화가 유행하였다. 마침 그가 통신사의 수행 화원으로 갔을 때, 그의 그림을 받기 위해서 일본인들이 밤낮으로 줄을 섰다고 한다. 그는 일본에 'K-아트' 열풍을 불게 한 선두주자인 셈이다.
'설중귀려도'에는 웅장한 자연 속에 세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여행하던 선비가 거센 눈발에 영락없이 발이 묶여 주막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이튿날도 눈발이 멈추질 않자 서둘러 주막을 나선다. 짐 보따리를 어깨에 걸친 시동이 앞장서고 나귀를 탄 선비는 고개를 돌려 사립문에서 배웅하는 주모에게 고마움을 표현한다. 날은 어둡고 눈은 차곡차곡 쌓이는 데 갈 길은 멀다.
일필휘지로 거침없이 묘사한 바위 뒤로 키 낮은 나무가 추위와 맞서고 있다. 소담한 다리를 건너고 있는 시동과 선비는 세밀하게 그려서 표정이 살아있다. 무거운 짐을 진 탓에 엉거주춤한 시동의 얼굴이 해맑다. 방한모를 쓴 선비의 자태가 역동적이다. 먼 길을 나서는 나귀의 다리에는 힘이 들어가 있다. 두 그루의 큰 나무에 둘러싸인 주막은 아늑하게 자리를 잡았다. 사립문 앞에서 배웅하는 아낙은 다음을 기약한다. 높은 산에는 눈이 쌓여 흰 세상을 만들었다. 먹의 농담을 잘 우려낸 수려한 산수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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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덕장 '설죽' (종이에 옅은 색, 139.8×92.0cm, 간송미술관 소장) |
◆'겨울왕국'을 즈려 밟는 선비와 시동
산에는 뽀드득거리는 발걸음 소리만 천둥 같다. 산색을 하얗게 바꾸는 눈을 감상하며 걷는다. 심수(心水) 이정근(李正根·1531~?)의 작품 '설경산수도(雪景山水圖)'가 펼쳐진다. 기괴한 산이 우뚝 서 있고, 험한 산으로 둘러싸인 중턱에 예사롭지 않은 건물이 보인다. 신령스러운 광경이다. 흰 눈은 마법을 부려 동화의 세계를 만들었다. 자연의 조화가 경이롭다. 두 명의 인물이 산 중턱에 위치한 사찰로 향한다. 설국으로 변한 세상은 '겨울왕국'이다. 이정근은 화원이었던 아버지의 대를 이어 화원이 되었다. 아들과 손자도 화원으로 활동할 만큼, 그의 집안에 화원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안견(安堅) 풍의 그림을 그린 이정근은 물기가 가득한 미법(米法) 산수화를 그리기도 했다.
'설경산수도'는 큰 산을 주제로 한 안견의 화풍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근경에는 언덕과 나무, 인물을 설정하였다. 중경에는 낮은 산을 짜임새 있게 그렸다. 원경에는 신비로운 큰 산을 배치하여 중심을 잡았다.
화면 아래에는 두 명의 인물이 다리를 건너고 있다. 눈보라를 헤치며 걷는 모습이 선비와 시동 같다. 왼쪽 언덕에는 눈꽃이 핀 나무로 숲을 처리하여 깊은 공간감을 주었다. 중경에는 작은 언덕이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어, 호수에 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신령스러운 산을 우뚝 세우고, 기이한 산 사이에 배치한 사찰의 풍모가 고풍스럽다. 오른쪽에 '이정근'이라는 붉은 인장을 찍었다. 정교한 화면 구성과 필치가 설경을 더 웅장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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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국 '설중귀려도' (모시에 옅은 색, 101.7×55.0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대나무에 깃을 접은 눈 눈 눈
산을 오르다가 눈 덮인 정자에 앉아 숨을 고른다. 흰 눈을 이불처럼 덮은 대나무 숲에 까치가 날아올라 정적을 깬다. 눈은 사물을 변화시키는 마법의 손을 가졌다. 겨울잠에 든 나무마다 눈꽃을 피웠다. 수운(岫雲) 유덕장(柳德章·1675~1759)의 '설죽'에도 마법의 손길이 닿았다. 대나무에 내려앉은 흰 눈이 소담스럽다. 눈은 강인한 대나무를 위로하듯 부드럽게 덮어준다.
유덕장은 명문가의 사대부였지만 관직에 뜻을 두지 않았다. 율곡학파의 노론들이 주도권을 잡은 영조 대에 남인 가문이었던 그는 정치에 입문할 수 없는 처량한 신세였다. 숨죽이며 묵죽화로 세상을 달관하며 보냈다. 군자의 올곧은 품위를 닮은 사군자에 심취했다. 탄은(灘隱) 이정(李霆·1554~1626)의 묵죽화풍을 이어받았다. 문인 혜환 이용휴(李用休·1708~1782)는 "이정의 대나무는 호방하고 빼어나며, 무성하고 장대하여 기세로 뛰어났다. 유덕장의 대나무는 맑고 윤택하며, 흩어지고 비어서 운치로 뛰어났다"라고 평했다. 이 평가처럼 유덕장의 대나무는 차분하고 부드러운 필치에 힘입어 서정성이 우러난다.
'설죽'은 1753년, 나이 79세에 그렸다. 눈 덮인 언덕에 두 개의 바위 사이로 녹색의 대나무가 고고하게 서 있다. 화면 아래에는 잔설을 인 난초가 청초하다. 대나무 잎에 흰 눈이 쌓여 녹색이 더 선명하다. 추위에 맞선 대나무의 강인함이 오히려 따스하다. 여유롭고 부드러움이 감도는 유덕장의 개성 넘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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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희 화가 |
◆그림으로 승화시킨 우정의 멋
실컷 설경을 구경하고 하산한다. 누군가와 설경을 감상하고 싶어 옛 그림을 펼친다. 관아재(觀我齋) 조영석(1686~1761)의 '설중방우도(雪中訪友圖)'에 눈길이 닿는다. 눈 오는 날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친구와 마주 앉아 정담을 나누는 작품이다. 눈을 핑계로 그리운 벗을 마주하니 이보다 좋을 순 없다. 제목의 '설중방우(雪中訪友)'는 중국의 고사다. 내용은 한밤중에 눈이 내리자 보고 싶은 벗을 찾아갔지만, 정작 그의 집 앞에 이르러서는 벗은 만나지 않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벗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떠나는 길 위에서 이미 기쁨을 받았기 때문일까. 이후, 진한 우정을 나누는 '설중방우'는 문인과 화가들이 즐겨 다룬 소재가 되었다.
조영석은 서민들의 생활상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사대부 화가였다. 이규상(李圭象·1727~1799)이 조선 시대 후기 인물을 평한 '일몽고(一夢稿)'의 화주록(畵廚錄)에 "조영석은 그림의 재주가 매우 뛰어나 필획이 정밀하고 세련되었으며 구도와 배치에서도 세속의 평범함을 뛰어넘고 있다. 필획과 구도 외에도 신운(神韻)의 정체함이 빛을 발하여 드러나고 있다"라고 기록하였다. 조영석은 이처럼 사물의 특징과 형상을 충실히 묘사하고, 색채까지도 실제처럼 표현한 사실화풍을 이끌었다.
'설중방우도'는 함박눈이 내리는 날 방한모를 쓰고 찾아온 벗과 서재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는 조영석 자신의 모습을 그린 것 같다. 눈 오는 것도 즐거운데, 친한 벗까지 오니 기쁨은 몇 배가 된다. 주인은 정중하게 손님을 맞이한다. 눈을 즐기기 위해서 서재 방문을 활짝 열었다. 방안에는 가득 쌓인 책만큼 주인의 고매한 인품도 수북이 쌓였다. 손님 또한 다소곳한 모습에 예의를 갖추고 그간의 안부를 묻는다. 우정의 꽃이 핀다.
집 뒤로 흰 눈이 덮인 산세가 수려하다. 정갈한 집 뜰에는 멋스러운 소나무와 향나무를 심어 주인의 미적 감각을 살렸다. 화면 아래에는 두 명의 인물이 있다. 소를 타고 온 손님이 집 안으로 들어가자 멀리서 온 시동이 소고삐를 쥐고 집 안으로 향한다. 이를 본 주인집 시동이 미소를 띤 채 대문 앞에서 팔을 벌리고 격하게 반겨준다. 선비들의 인품 못지않게 시동들 역시 우정을 표현한다. 인물의 표정과 동세에서 현장감이 물씬 풍긴다. 조영석은 한 컷의 사진처럼 우정을 작품으로 남겼다.
◆자연이 제작한, 설경이라는 '대지미술'
하얀 세상을 연출하던 눈이 그쳤다. 먼 산이 흰 가루로 덮여 있다. '대지미술'이다. 자연만이 제작할 수 있는 위대한 예술이다. 단색의 힘은 무한하다. 끝없이 펼쳐진 흰색 속으로 빨려든다. 설경은 자연이 준 선물이다. 선물은 길을 떠나게 하고 우정을 돈독하게 한다. 인간은 자연의 축복으로 더 아름다워진다.
<화가 2572ki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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