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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직구 핵직구] 남의 빚 갚아주기

2023-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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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동 변호사

우리 세대의 성공담 중에는 '무능하고 마음 좋은 아버지'가 많이 등장한다. 남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아버지가 빚보증을 잘못 서 가산을 탕진해 어려운 유년시절을 보냈다는 회고다. 옛날에는 은행에서 대출을 할 때에도 보증인을 요구했고 청년이 직장을 얻을 때에는 신원보증인을 세워야 했다. 끈끈한 인간관계를 내세우는 사회에서는 이를 매정하게 거절하는 일이 쉽지가 않았다.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에서도 작가의 오지랖 넓은 빨치산 출신 아버지는 '뼈가 삭게 일을 해서 돈이 조금 모이면' 남의 빚보증을 잘못 서 번번이 한방에 날려 먹었다. 결국 딸에게까지 그 책임이 미치게 되었을 때 어머니의 넋두리는 우리 세대에게는 그렇게 낯설지가 않다. "아이고, 워디 물레줄 것이 어서 허다허다 빚까지 물레줄라요? 애비가 돼가꼬 딸내미한테 해준 것이 멋이 있다고 쟤를 보증을 세우요. 세우길." 지금은 금융기관에서 보증인을 요구하는 경우도 잘 없고 신원보증인도 없어졌다. 제도 이전에 남의 빚보증을 서줄 만한 인간관계가 먼저 사라져 버렸다.

이번에 우리 정부는 일본의 대기업들이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부담하여야 할 손해배상금을 우리 기업들로부터 돈을 거두어 대신 갚아주겠다는 냉혹한 국제사회에서 보기 드물게 마음 좋은 결정을 내렸다.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바라는 선의에서 나왔다는 이 방안이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는 것은 일반 국민의 건전한 상식과는 너무나 동떨어졌다는 점일 것이다. 멀쩡한 일본 전범(戰犯) 기업의 빚을 떠안겠다는 것도 그렇고, 더구나 그 기업이나 일본 정부가 채무자들에게 빚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하고 있음에도 피해자인 우리 정부가 스스로 갚겠다고 나서는 것도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다. 우리 대법원 판결이 잘못되었다고 스스로 인정하고 사죄하는 꼴이 되었다.

물론 민법에서는 이해관계 없는 제3자도 남의 빚을 갚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의 경우에 피해자들의 채권은 강제징용으로 인한 재산적 손실이 아니라 정신적 보상인 위자료다. 대법원 판결에서 밝힌 피해자들이 태평양전쟁과 중일전쟁의 말기에 일본 군수기업에 동원되어 겪은 참혹한 고통을 읽어보았다면, 가해자에게 아무런 사과나 반성도 요구하지 않고 어느 주머니에서 나왔든 같은 돈이니 받고 잊으라는 이번 방안은 피해자들의 탄식처럼 과연 어느 나라 정부인지를 의심케 하는 일이다.

돈을 내는 우리 기업의 경우에도 수많은 주주의 재산을 상관도 없는 남의 빚을 갚는 데에 쓰는 경영진의 결정이 배임죄에 해당할 수도 있고, 이를 기업에 요구하는 정부는 제3자뇌물죄의 책임을 질 수 있다는 말도 나온다. 허무맹랑한 생각으로 치부할 수도 있지만 지금 민주당 이재명 대표를 탈탈 털어 무리한 법 적용을 일삼는 검찰이라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권력의 향배에 민감하여 '바람보다 더 빨리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서는' 검찰이 언제 방향을 바꿀지 누가 알겠는가.

이런 무리한 일의 명분이라는 한미일 군사동맹도 탈냉전시대에 시대착오적인 일로 보이고, 미국과 일본을 합친 것보다 훨씬 많은 교역을 하는 중국과 대립각을 세우는 것도 실리에 반한다. 윤 대통령이 과거에 문재인 정부를 비난하며 했던 말이 떠오르는데, 과거의 말로 현재를 반박할 수 있다는 것이 윤 대통령의 특징이기도 하다. "임기 5년이 뭐가 대단하다고. 너무 겁이 없어요!" 벌써 1년이 지나기는 했다.
이재동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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