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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저력있는 호국의 도시 상주 .4] 노병대와 채기중

2023-05-24

을사늑약·경술국치 분노…항일조직 결성 투쟁하다 옥중 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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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 화동면 이소리에는 고종으로부터 밀조를 받아 속리산에서 의병을 일으킨 노병대의 생가 터와 함께 그의 위패를 모신 숭렬사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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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 이안면 소암리에 복원된 채기중 생가. 채기중은 대한광복회 결성을 주도하고, 군자금 모금과 친일부호 처단 등 일제에 맞서다 순국했다.

"너는 어째서 의병을 일으켰느냐?" "너희는 우리 원수다. 너의 종족을 다 없애려 한 것이다." "함께 일을 꾀한 사람이 몇 명인가?" "내가 주모자이니 다른 사람은 알 것 없다." "죽음이 두렵지 않느냐?" "거사할 때 죽을 사(死) 자를 이마 위에 붙여 놓았다. 속히 죽여라."

일본의 강제병합을 전후하여 유생들에게는 세 가지 길이 있었다고 한다. 첫째는 의병으로 봉기하여 싸우는 것, 둘째는 자결 순국하는 것, 셋째는 은거하여 유학의 도를 지키는 것이었다. 위의 문답은 1908년 일본군에게 체포된 상주사람 노병대의 심문 내용이다. 그에게 세 가지 길은 선택이 아니라 '전부'였다. 그리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들이 그 '전부'의 길에 있었다.

노병대, 고종 비밀조서 받고 속리산서 의병 일으켜
지독한 고문 탓 왼쪽 눈 잃고도 단식 이어가며 항거
채기중, 풍기광복단 결성 이후 대한광복회로 합세
친일부호 처단 앞장서다 서대문형무소 형장 이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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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렬사 입구에 서 있는 의병장 노병대 순국비.

◆의병장 금포 노병대

노병대(盧炳大)는 1856년 12월4일 상주 화동면 이소리에서 노종구(盧宗九)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호는 금포(錦圃), 본명은 병직(炳稷)으로 조선 전기에 이름을 떨친 소재 노수신(盧守愼)의 아우 후재(厚齋) 노극신(盧克愼)의 후손이다. 그는 일곱 살 때 글을 읽고 외웠으며 열 살 때는 글을 직접 지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할 정도로 영특했다고 한다. 열세 살에는 당대 유림의 종장이었던 성재(性齋) 허전(許傳)의 눈에 들어 그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이후 1880년 김원덕(金遠德)의 딸 의성김씨(義城金氏)와 혼인해 가정을 꾸렸고 1889년에는 창릉(昌陵)을 관리하는 참봉직을 맡았다. 그러던 1895년, 을미사변에 이어 을미개혁이 단행된다. 향교가 폐지된다는 소식에 분노한 그는 상경하여 반대 상소를 올렸으나 소용이 없었다.

1905년, 통한의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노병대의 나이 마흔아홉이 되던 해였다. 그는 전 이조판서 이용원(李容元)을 찾아가 의병 봉기의 뜻을 전했다. 이를 전해 들은 고종은 '노병대에게 분충정난(奮忠靖亂) 2등을 내리고 특차비서원비서승(特差秘書院秘書丞)을 제수한다'는 조서를 비밀리에 내렸다. 합당한 벼슬로 힘을 실어주겠다는 뜻이었다. 노병대는 고향으로 돌아와 동지들을 모아 거사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2년이 지난 1907년 8월 그는 임용헌(林容憲), 김운로(金雲老), 송창헌(宋昌憲) 등과 함께 속리산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른바 '노병대 부대'다. 이때 소요된 막대한 자금은 전부 노병대가 감당했다. 이들의 창의 소식에 '서울시위대'와 '청주진위대'의 해산병 200여 명이 합세해 부대의 규모는 며칠 사이에 무려 1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노병대는 김운로를 부대의 우두머리로 추대하고 전열을 정비했다.

'노병대 부대'는 첫 작전으로 보은(報恩)을 습격해 일본인 2명을 사로잡고 상주의 청계사(淸溪寺)로 진을 옮겼다. 하지만 적병의 급습으로 청주 미원(米院)으로 다시 옮겼고, 그 과정에서 적 5명을 또 생포했다. 미원에서 지휘부는 부대를 둘로 나누어 움직이기로 결정했다. 이후 노병대가 이끄는 부대는 성주에서 적 10여 명을 사로잡는 등 전투를 이어나갔다. 우두령(牛頭嶺)을 넘어 김천으로 접어들었을 때였다. 매복해있던 일군이 공격해왔다. 전투는 치열했고, 살아남은 자는 고작 50여 명에 불과했다. 그는 결국 1908년 보은에서 청주수비대 소속 일군에게 체포되었다. 심문 중 그는 말했다. "거사할 때 죽을 사(死) 자를 이마 위에 붙여 놓았다. 속히 죽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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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암리 만세동산에 조성돼 있는 채기중 추모비.

노병대가 끝내 굴복하지 않자 일본군은 그를 공주재판소로 보냈다. 지독한 고문이 쉴 새 없이 이어졌고 급기야 그는 왼쪽 눈을 잃었다. 끔찍한 만행으로 육신이 망가질 대로 망가진 노병대는 죽기를 결심하고 단식을 시작했다. 그가 혼수상태에 빠지면 일제는 음식물을 강제로 투입해 깨어나게 한 뒤 다시 고문과 회유를 이어갔다. 그리고 재판에 회부되어 10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옥에 갇힌 그에게 식솔이 찾아왔다. 그는 이소리의 야로당(野老堂) 종택이 일제에 의해 잿더미가 되었고, 아내 의성김씨가 집 앞 연못에 몸을 던졌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1910년 8월29일, 한일병합이 발표되었다. 이에 일제는 전국에 사면령을 내렸고 노병대 역시 석방되었다. 그는 다시 항쟁을 계획하다가 1913년 3월 체포되어 또다시 15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감옥에서 단식으로 항거하다가 28일 만인 7월9일(또는 10일) 피를 토하고 세상을 떠났다. 일제에 의해 잿더미가 된 이소리 집터에는 지금 의병장 노병대의 순국비와 그의 옛 집터라는 표석이 서 있다. 그 뒤쪽에는 그를 모신 숭렬사가 자리하며 매년 4월 말경 숭모회에서 추모 제향을 한다. 나라에서는 그의 뜻을 기려 1968년 건국훈장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항일의사 소몽 채기중

상주 이안면에서 함창으로 가는 소암리 길가에 '만세동산'이라 새겨진 자연석 하나가 서 있다. 나지막한 가차산(까치산) 아래 반듯한 세 개의 비가 우뚝한 작은 공간이다. 오른쪽 비석은 독립만세 기념비다. 1919년 상주의 독립만세운동은 3월23일 상주시장을 시작으로 4월 초까지 5회에 걸쳐 일어났다. 그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던 장소 중 하나가 이곳 소암리였다. 마을은 인천채씨 집성촌으로 당시 채세현, 채순만 등의 주요 인사가 검거돼 고초를 겪었다고 한다. 왼쪽의 비석은 후곡(后谷) 채섬환(蔡暹奐)의 추모비다. 그는 1907년 대한제국군 해산이 단행되자 운곡 이강년의 의진에서 활동한 인물이다. 그리고 가운데에 소몽(素夢) 채기중(蔡基中)의 추모비가 있다. 그의 이름 앞에는 순국항일의사(殉國抗日義士)라고 새겨져 있다. 마을 이름은 원래 소암(素岩)이었다. 일제는 이를 소암(小岩)으로 바꾸었다. 그 이유가 소몽 채기중 선생 때문이라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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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기중 생가 내부에는 선생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소몽 채기중은 고종과 흥선 대원군의 대립이 극을 향해 달리던 1873년 7월7일, 이곳 소암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채헌락(蔡獻洛), 어머니는 곡부공씨(曲阜孔氏)로 5형제 중 막내였다. 원래 양반 집안이었으나 가진 땅이 조금 있을 뿐 식량을 겨우 자족할 형편이었고, 그는 서당에서 한학(漢學)을 배우며 옛 충신과 열사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숭배했다고 전한다. 어지러운 시간이 흘러 1906년 봄, 34세의 채기중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 풍기(豊基)로 터전을 옮겼다. 풍기는 전국에서 모여든 사람이 많았고, 소백산 깊은 골짜기는 피신하기에 좋았다. 그는 이듬해인 1907년 8월, 풍기·순흥 전투를 경험했고 11월에는 치열했던 죽령 전투에 참전했다. 1910년 경술국치로 나라를 잃은 후 그는 본격적으로 동지들을 모았다. 1912년에는 의병 출신을 중심으로 결사대가 꾸려졌다. 그리고 일제의 무단통치가 극에 달하던 1913년, 채기중을 중심으로 한 19인의 항일 무장 비밀 결사인 '풍기광복단'이 결성된다. 곧 지역 유림과 계몽운동가 등이 가세하면서 200여 명으로 규모가 커졌다. 그들은 조직적인 대일 항쟁을 벌였다. 특히 영주에 '대동상점'이라는 위장 업체를 운영하여 독립 자금을 모금했다.

1915년 채기중은 대구 조선국권회복단의 박상진(朴尙鎭)과 인연을 맺게 된다. 그리고 박상진을 중심으로 한 대구의 조선국권회복단, 임병찬을 중심으로 한 전라도의 독립의군부 등과 합세하여 한반도와 만주를 포괄하는 '대한광복회'를 결성했다. 박상진을 총사령으로 세운 대한광복회는 비밀, 폭동, 암살, 명령 등을 4대 행동강령으로 채택했다. 그리고 군자금 모금, 혁명기지 건설, 친일부호 처단, 무기 구입, 독립군 양성 등을 목표로 경상, 전라, 충청 등 국내 각지에 비밀지부를 조직했다. 이 가운데 경상도지부의 책임자가 된 채기중은 경상도 북부지방을 중심으로 회원과 군자금을 모으는 데 전념했다. 그러던 중 박상진이 대구권총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자 채기중이 조직을 사실상 지휘하면서 '대한광복단'으로 재정비하였다.

'풍기광복단'으로 시작된 '대한광복단'은 약 10년간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이 과정에서 악질 친일 부호 처단 등의 사건이 일경에 노출되면서 단원들이 대거 체포되었고 대한광복단은 일제의 주목을 받게 된다. 결국 채기중은 강순필, 박상진, 김한종, 김경태, 장두환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3년 동안 진행된 고통스러운 재판 끝에 채기중은 사형을 선고받았고 1921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만세동산에 서 있는 그의 추모비 아랫돌에는 그가 옥중에 쓴 시가 새겨져 있다. '살았으면서 의리가 없다면 그것은 산 것이 아니며 하늘의 뜻에 따라 죽는다면 죽음이 곧 삶이로다.' 소암리 마을에는 채기중의 생가가 복원되어 있다. 나라에서는 그를 기려 1963년 건국훈장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광복70주년 상주의 항일독립운동, 상주문화원, 2016. 박찬승, 한국독립운동사, 2014. 한국학중앙연구원.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 국가보훈처, 1997. 독립운동사,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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